[김성호 세상보기]첨단 영화 '흑금성의 비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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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엊그제 열린 제70회 아카데미 영화상 시상식에서 '타이타닉' 이 11개 분야에서 수상했다.

아, 분하다.

한국에서 제작 중인 '흑금성의 비밀' 이 일찍 제작 완료됐다면 그 기록을 깼을 텐데!

도대체 한국 안기부와 검찰은 뭘 꾸물대고 있는가.

영화를 만들어 외화를 획득하려면 세계 시장에 내놓을 타이밍을 맞출 줄 알아야지. 지금까지 제작 낙수 (落穗) 를 통해 흘러 나온 얘기를 종합하면 '흑금성의 비밀' 은 공전 절후의 히트작이 될 것 같다.

이 영화의 위대성은 만화 애니메이션 (동화) 과 실제 연기를 교묘하게 합성했다는 점이다.

어느 것이 만화 (믿을 수 없는 일) 이고 어느 것이 라이브 액션 (믿을 수 있는 일) 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다고 중간 시사회를 본 사람들은 혀를 내두른다.

오죽하면 만화영화인데도 첨단 영화라는 설명문이 붙었을까. 그래서 기대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방면의 기념비적 작품인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는가 (Who Framed Roger Rabbit)' 를 능가할 것이라고 말한다.

1988년 스필버그와 월트 디즈니사가 공동 제작한 이 영화는 아카데미 애니메이션, 특수 영상효과상 등 3개를 수상했다.

만화영화에 등장하는 갖가지 동물들과 사람의 실제 연기가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합성된 영화다.

'흑금성의 비밀' 에서 두드러지게 우수한 만화 부분을 보면 이른바 북풍의 배경 장면이다.

베이징 (北京) 의 한 호텔에 암호명 북극성이 떡 버티고 앉아 있다.

서울에서 온 백가면 (白假面) 이 들어온다.

"김대중을 쳐 주시오. 3백60만달러를 드리리다."

"나가 기다리시오. " 곧 이어 황가면이 들어온다.

"아까 그 자의 말을 듣지 마시오. 당선되면 원조도 하고 연방제도 추진하리다."

"나가 기다리시오. "

(그런데 김대중은 노회 (老獪) 해서 믿을 수가 없단 말이야. ) 이번엔 청가면이 들어온다.

"대선에서 서로 협력합시다."

"나가 기다리시오. "

(그런데 이인제는 젊은 애라 다루기가 쉬워. ) 드디어 흑금성이 등장한다.

"그대는 이회창 캠프, 김대중 캠프, 이인제 캠프에 모두 침투하라. 그리고 목욕 재계 (齋戒) 하라, 곧 수령님을 뵙게 될 테니까. " 흑금성은 돌아서서 미소짓는다.

가면들의 암약은 모두 내 문건에 기록됐다고. (아 정말 이것은 만화일 거야, 사실이 아닐 거야. 아무리 만화영화의 주인공들이 개와 토끼라고 해도 이렇게 개판 토끼판이 될 수는 없어. ) 이 첨단영화에서 또 하나의 명장면은 시공 (時空) 을 뛰어넘은 플래시백 (과거 회상장면으로의 전환) 수법이다.

때는 현재에서 기원전 1446년의 구약 (舊約) 성경 시대로 3천5백년을 뛰어 넘는다.

장소도 한국에서 이집트로 옮겨진다.

등장인물의 이름 앞에는 구약시대 인물의 이름에서 딴 암호명이 붙는 것이 이 장면의 특색. "나 모세 권영해는 여호수아 이대성 고성진 등을 이끌고 가나안 복지를 향해 떠났다.

시나이반도에 이르러 아말렉 친북세력의 저항을 받았다.

그들을 도말 (塗抹) 하겠다는 신의 약속을 믿고 우리는 열심히 싸웠다.

그때 어느 장로가 비아냥댔다.

뭐, 암호명 여호수아는 여권후보이고 아말렉 부족은 김대중후보가 아니냐고? 에잇 분하다, 할복이다. "

만화 같은 현실, 현실 같은 만화가 두루 뭉수리로 전개되자 흑금성의 연기에만 매료됐던 관중들은 제작.감독진의 맹활약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이런 처절한 영화를 만들어도 좋으냐는 힐난이 쏟아졌다.

이 첨단영화는 과연 유종의 미를 거둘 것인가, 아니면 미완의 대작이 될 것인가?

김성호〈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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