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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전환기의 충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기원전 506년 오 (吳) 나라 군대가 초 (楚) 나라 수도 영 (영) 을 함락했다.

이때 오군 사령관 오자서 (伍子胥) 는 초의 전 임금 평왕 (平王) 의 능을 파헤쳐 그 시신에 채찍질 3백대를 가했다고 한다.

시신을 모독하는 것은 고대 중국에서 일찍부터 금기시된 잔혹행위였다.

더욱이 평왕은 오자서가 오나라로 망명하기 전 신하로서 모시던 옛 임금이었다.

오자서의 채찍질에는 깊은 원한이 서려 있었다.

오자서의 아버지 오사 (伍奢) 는 원래 평왕의 태자를 보좌하는 태부 (太傅) 였는데, 평왕이 간신의 농간에 따라 태자를 핍박하는 무도함을 간하다가 온 집안이 몰살당했다.

오자서만이 태자를 모시고 겨우 몸을 빼 달아나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가 오나라에 망명하였고, 거기서도 십여년간 온갖 곡절을 겪은 끝에 복수의 날을 맞은 것이었다.

오자서의 극렬한 복수가 오히려 초나라가 되살아나는 길을 만들어주었다.

오자서의 옛 친구 신포서 (申包胥) 는 진 (秦) 애공 (哀公)에게 구원군을 청했다.

초나라와 사이가 나쁘던 진나라는 초나라의 멸망을 방관할 작정이었지만 신포서가 사흘밤낮을 쉬지 않고 통곡하며 청원하자 감동하여 "이런 신하를 둔 나라라면 살리지 않을 수 없다" 고 출병을 결정했다.

이 복수극은 춘추 말기의 일이다.

주군에의 충성을 절대시하던 춘추시대의 정치도덕으로는 아무리 살부 (殺父) 의 원한이라 하더라도 주군의 시신에 매질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선비들이 자기 능력을 써 주는 주군을 찾아 천하를 주유 (周遊) 하는 전국시대 분위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의 시대상을 오자서의 복수극은 보여주는 것이다.

비극으로 시작한 오자서의 일생이 또 하나의 비극으로 마무리되는 데서 전환기의 패러독스를 읽을 수 있다.

말년의 오자서는 오왕 부차 (闔閭)에게 월 (越) 나라를 경계하도록 극간 (極諫) 하다가 죽임을 당한 것이다.

와신상담 (臥薪嘗膽) 의 고사 (故事) 로 널리 알려진 이 갈등 속에서 오자서는 춘추시대 신하의 충성심을 더 없이 모범적으로 구현했다.

이홍구 (李洪九) 씨의 주미대사 부임을 놓고 한나라당 일각에서 비판이 나오는 모양이다.

'불사이군 (不事二君)' 의 케케묵은 도덕률이 아니라도 당 대표까지 지낸 사람이 그럴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입장에서도 유능한 인물을 구분없이 쓰지 않을 수 없는 위기상황임을 생각한다면 이것도 탕평 (蕩平) 을 향한 시대전환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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