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문창극 칼럼

공인의 죽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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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어떤 죽음이라도 그것은 사람들을 슬프고 안타깝게 만든다. 특히 그를 따랐던 지지자들에겐 그의 비극적 종말이 더욱 안타까웠을 것이다. 그날도 검은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 입은 젊은이가 적지 않았다. 이들의 슬픔을 막을 사람은 누구도 없다. 슬픈 사람들의 눈물을 경찰이 막을 수는 없다. 막아서도 안 된다. 그런 점에서 조문과 관련하여 경찰이 첫날 보인 신경과민적 반응은 오히려 역효과만 나게 만들었다. 나는 그들이 실컷 울고 마음이 깨끗해지길 바랐다. 눈물로 마음을 씻고 이 땅에 평화가 찾아오기를 바랐다.

나는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지 않는다. 사람들은 누구나 살다가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는 경험을 한다. 죽음으로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다’는 말을 한다. 부모님 때문에, 처자식 때문에, 하던 일 때문에…. 나 아닌 남에 대한 책임감이, 또는 사랑이 죽고 싶은 감정을 누르는 것이다. 국가 지도자라면 그런 식의 죽음이 끼칠 영향을 조금이라도 생각했어야 하지 않을까. 죽으려는 사람이 무슨 생각이 있었겠느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재임기간 중에도 그의 약점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대통령을 지냈다는 대표성과 엄중함에 왜 의식이 미치지 못했을까. 그가 유언에서 ‘나는 대통령으로서 명예를 지키지 못해 이렇게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나의 죽음으로 나라가 분열을 넘어 새 길을 가기 바란다’고 했다면 어땠을까. 그렇지 않아도 세계 최대의 자살국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이 나라에서 대통령을 지낸 사람까지 이런 식으로 생을 마감한다면 그 영향이 어떻겠는가.

죽음이 모든 것을 덮는다고 하지만 그의 죽음은 자연인과 공인의 성격으로 나누어 판단해야 한다. 자연인으로서 가슴 아프고 안타깝지만 공인으로서 그의 행동은 적절치 못했다. 그 점이 그의 장례절차나 사후 문제에도 반영되어야 했다. 검찰의 처리도 문제다. 그가 큰 범죄자인 양 몰아붙이다가 그가 죽자마자 “모든 수사는 종결된다”고 했다. 당사자가 죽음으로써 자연스럽게 공소권이 상실된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범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죽은 그를 괴롭히자는 얘기가 아니다. 사실은 무엇인지, 검찰의 억지는 없었는지가 밝혀져야 한다. 정치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변명과 분위기에 흔들리는 것이 바로 정치 검찰임을 스스로 말해 주는 것이다. 경호실도 마찬가지다. 당연히 이런 일까지도 예상하고 경호에 만전을 기해야 했다. 우리는 퇴임 대통령 하나를 보호하지 못하는 불명예스러운 나라가 되었다. 죽음이 안타까운 것과 나라가 나라로서 틀을 지켜가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노 전 대통령이 가장 존경했던 인물은 링컨이었다. 링컨은 남북전쟁이 끝나갈 무렵 재선되었다. 미국은 이 전쟁으로 인해 갈갈이 찢어져 있었다. 그는 취임 후 6주 만인 1865년 4월 14일 백악관 근처 포드 극장에서 저격당해 사망했다. 모든 국민은 남북의 정치적 입장을 떠나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그의 3대 명연설로 꼽히는 재선 취임사에서 그는 국민들에게 용서와 관용을 촉구했다. “아무에게도 악의를 갖지 말고, 모두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옳음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분열된 나라의 상처를 치유합시다. 전쟁을 일으킨 사람이나, 그의 미망인, 그의 고아들을 돌보면서 우리 자신과 이 나라에 평화와 정의가 이루어지게 합시다.” 사람들은 그가 죽었을 때에 이 연설의 의미를 되돌아보았다. 그가 이미 죽음을 예견하고 미국인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라고 받아들였다.

죽음의 의미는 죽은 당사자가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에 의해 어떻게 받아들여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의 죽음의 의미는 달라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그의 죽음으로 우리의 분열을 끝내자고 제안한다. 이제 서로의 미움을 털어내자. 지난 10년의 갈등을 그의 죽음으로써 종지부를 찍자. 특히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그의 죽음을 의미 있게 만들 의무가 있지 않겠는가.

문창극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