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졸초임 삭감] “우수 인재들 경쟁업체에 빼앗긴다” 기업들 주저주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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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최근 대졸 신입사원 초임을 깎기로 최종 결정한 A사 인사부의 김모 팀장은 “앞으로 조직관리가 큰 걱정”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되면 신입사원과 기존 사원 간 임금 차이가 너무 커져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보통 6개월마다 신입사원을 뽑는다. 현재 입사 전형 중인 사람들이 들어올 경우 대졸 초임 삭감으로 인해 6개월 전에 뽑혀 근무 중인 기존 사원보다 연봉이 600만원이나 적어진다.

김 팀장은 “우리 기업만 전국경제인연합회의 방침을 충실히 따르다 보니 이 같은 일이 생겼다”며 “이런 불합리성 때문에 연말까지만 한시적으로 적용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30대 그룹 중 대부분은 대졸 초임 삭감을 하면 득보다 실이 더 많다는 목소리다. 전경련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과도한 임금 인상에 따른 기업의 경쟁력 저하를 막겠다면서 대졸 초임 삭감 방안을 추진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업은 전경련이 기업의 목소리를 수렴하지 않고 정부 정책에 호응하기 위해 무리하게 추진한 것이라며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우수인재 뽑는 데 걸림돌=대기업 인사팀장들은 대졸 초임을 삭감할 경우 우수인재를 경쟁업체에 빼앗길 수 있다며 우려하고 있다. 경쟁 구도가 분명한 유통업계(롯데-신세계)와 항공업계(한진-금호아시아나) 등에서 이 같은 양상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서로 눈치를 보느라 대졸 초임 삭감을 할 수 없었다고 호소한다. 만약 우리만 임금을 낮추게 되면 좋은 인재들을 경쟁업체에 뺏길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익명을 요구한 전경련의 한 관계자는 “취업 준비생들은 조금이라도 연봉이 높고 안정된 직장을 찾는 만큼 대기업들이 초임을 삭감하는 데 느끼는 부담은 당연한 일”이라며 “일자리 나누기 못지않게 ‘미래에 대한 투자(좋은 인재 확보)’ 또한 중요한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대기업에 입사해야 할 우수인재들이 공공부문 및 은행권으로 이탈할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도 있다.

성균관대 조준모(경제학과) 교수는 “민간 대기업들은 한번 삭감된 임금을 쉽게 보전해주기 힘든 만큼 경제회복기에는 우수한 인재들이 대우가 좋은 공공부문이나 금융권으로 빠져나가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이어 “민간 대기업은 치열한 글로벌 경쟁구도에 놓여 있는 만큼 공공부문에 비해 더 우수한 인재를 필요로 한다”고 덧붙였다.

◆노조의 반발도 커=일부 기업은 별 이득도 없으면서 괜히 노동조합만 자극할 가능성이 커 초임 삭감을 추진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강성 노조가 있는 현대자동차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현대차는 전경련의 강력한 주문에도 불구하고 따를 수 없다는 방침을 분명히 밝혔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과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 등이 “임금 삭감에 항변할 수 없는 대졸 신입사원을 희생양으로 삼는다”는 비난이 부담스럽다는 게 이들 기업의 설명이다. 본지의 조사결과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대외적으로 대졸 초임을 삭감하지 않겠다고 공표한 그룹은 13곳. 이들은 사회 전체적으로 임금 수준이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대졸 신입사원의 희생만 강요한다는 인상을 심어줘서 좋을 게 없다는 계산이다.

삼성경제연구소 손민중 연구원은 “1990년대 초 독일 금속노조는 임금조정 없는 고용유지를 요구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면서 “노동계는 고용보장과 임금 개선 등을 동시에 요구하기보다는 고용안정을 보장받는 대신 금전적인 불이익을 수용한다는 협력적 자세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실제론 임원 연봉 깎기 많아=일자리 나누기 차원에서 대기업들은 대졸 초임을 삭감하는 방안보다 임원의 연봉을 삭감하거나 일부를 반납받는 방식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30대 그룹 가운데 24곳에서 임원 연봉을 삭감했거나 반납받았다. SK그룹의 경우 임원들로부터 임금을 반납받아 100억원의 재원을 마련했다. STX그룹 또한 임원 연봉 10∼20%를 반납받고 대졸 초임 삭감, 노조원 임금 동결 등 가장 강력하게 허리띠를 졸라맸다. 대졸 초임 삭감 방안을 따르지 않은 하이닉스는 임원 수를 줄이고, 희망퇴직과 순환무급휴직 등으로 인건비를 줄였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전 임원을 대상으로 연봉제를 실시하고 있는 만큼 임원 임금 20%를 삭감했다고 하지만 경기가 회복되면 연봉계약을 다시 할 수 있어 경기 상황에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손 연구원도 “연봉제가 많이 확산돼 그동안 고임금이던 임원들의 임금이 많이 깎이다 보니 올해 말까지 임금상승률은 크게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임금을 깎는 만큼 대기업 내 일자리는 당초 계획보다 20% 이상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전경련 조사에 따르면 2월 경제계 대책이 발표되기 전 30대 그룹의 올해 신규 채용 규모는 3만6719명이었으나, 발표 이후 5만2620명으로 늘어났다.

심재우 기자



전경련 회장 기업도 석 달째 “검토 중”

“대졸 초임 높은 편 아니다
대신 신규 채용 10% 늘려”

 대졸 신입사원 초임 삭감을 주창한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조석래 회장 소유 기업인 효성그룹조차 석 달째 “검토 중”이라며 주저하고 있다. 이에 대해 재계는 의아하다는 반응이다. 효성은 전경련 회장 기업으로서 가장 솔선수범해야 하는데도 발표 석 달이 다 돼 가도록 검토 중이라는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익명을 요구한 효성 관계자는 이와 관련, “우리 회사는 대졸 초임이 높은 편이 아니기 때문”이라며 “대신 지난해 600명이던 신규 채용 규모를 올해 660명으로 10% 늘려 잡았다”고 해명했다. 그는 이어 “효성은 원래 한 해 250∼300명 정도를 신규 채용해 왔다”며 “전경련 회장 기업으로서 올해 일자리 늘리기에 동참한다는 취지에서 사상 최대 규모인 660명을 뽑는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일단 신규 또는 인턴 채용을 늘린다는 점에서 재계의 모범은 확실히 보인 것으로 해석해 달라”며 “임금을 낮춰 고용을 늘리고 생산성을 높이는 방안에 대해서는 현재 그룹 내에서 연구과제로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취업포털 사이트 등의 조사에 따르면 효성그룹의 대졸 초임은 3800만원 수준이다. 따라서 올 2월 전경련이 예시한 대졸 초임 삭감률을 따른다면 14∼28%를 깎아야 한다. 전경련은 당시 대졸초임이 2600만∼3100만원인 기업은 0∼7%, 3100만∼3700만원인 기업은 7∼14%, 3700만원 이상인 기업은 14∼28% 등 대졸초임 삭감률을 예시했다. 이번에 삭감하기로 한 기업 중 최대치를 적용한 대기업은 한 군데도 없었다. 대부분이 5∼20% 수준이었다.

심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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