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서] 노숙자에 국 퍼주는 대통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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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오전 독일 서베를린의 중심가인 촐로기셔가르텐(동물원) 기차역 주변 거리. 갑자기 인파가 몰려들었다. 종로 탑골공원이나 서울역 인근에서 많이 봐오던 눈에 익은 장면이 벌어졌다.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배급통에서 한 중년의 남자가 국자로 고깃국을 그릇에 옮겨 담고 있었다. 그 옆에는 정장 차림의 중후한 신사가 남루한 옷차림의 노숙자와 걸인들에게 국그릇을 나눠주었다. 끼니를 거르는 행인을 위한 무료 배식이다.

이날 배식에 참여한 신사는 지난 1일 임기를 시작한 신임 호르스트 쾰러 대통령이었다. 그는 전날 시민단체가 마련한 '민주주의를 위한 식탁'이라 이름붙여진 축하 식사행사에 참석했다. 각 지방에서 올라온 1200명의 국민과 함께 브란덴부르크문 앞 광장의 노천 식탁에서 취임 축하잔치를 연 것이다. 유명인사도 섞여 있었지만 대부분 평범한 사람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농촌 출신 대통령을 서민적으로 축하해주기 위한 자리였다. 식탁에는 고깃국에 감자와 수제비를 빚어넣은 쾰러 대통령의 수수한 고향음식이 메뉴로 올랐다.

이날 행사는 보통 사람들과 가난한 이웃을 잊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이 음식 가운데 일부는 다음날 무료 배식에 쓰였다. 지난주 쾰러 대통령 부부는 임시거처로 있는 달렘지역의 집주변을 산책하다 한 시민이 분실한 자동차 열쇠꾸러미를 발견해 주인에게 되찾아줬다.

물론 지난 열흘간의 이 같은 서민적 행보가 신임 대통령으로서 뭔가 보여주기 위한 제스처라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벨트 암 존탁 등 현지 언론들은 호의적이다. 비록 야당이 공천한 대통령이지만 당파적인 이익을 떠나 행동해 왔다는 점에서다. 취임연설에서 반대당인 집권 사민당(SPD)이 추진하는 개혁정책인 '어젠더 2010'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유권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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