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비즈니스 중국어' 어땠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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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손님:이 양들 모두 얼마인가요?
상인:전부 합쳐 6정(定) 주시오.
손님:이 정도 양을 그렇게 비싼 값을 받으면 정말 좋은 양은 얼마에 팔거요?
상인:'부르는 값은 거짓, 지불하는 값이 진짜'이잖소. 당신은 얼마나 내겠소?(중략)
손님:4정을 줄테니 그걸로 좋다면 팔고, 아니면 끌고 가시오.(중략)
상인:벌써 해도 져가는데 당신에게 밑지고 팔지요.

14세기 쓰여진 중국어 회화교본 '노걸대'(老乞大)에 등장하는 대목이다. 저자인 고려상인은 중국 베이징(北京.당시 연경)에서 벌어진 팽팽한 흥정현장을 중국 구어체로 기록해놨다. '중국에서 손해보지 않으려면 가격을 무조건 반으로 깎으라'는 속설이 600여년 전에도 통했던 모양이다. 이 노걸대의 '원본'격인 판본을 최근 고려대 국문학과 정광 교수가 현대어로 완역해 출간했다.

이 책은 한 고려상인이 사촌형제 둘과 인삼.말.모시 등 고려 특산품을 중국으로 가져가 팔고 중국 특산품을 사서 귀국할 때까지를 기록한 책이다. 흥정.숙박.계약 등 긴 여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106개로 정리하고 이에 맞는 중국어 대화를 삽입해 실용 회화를 배울 수 있게 했다. 요즘 출간되는 이른바 '비즈니스 회화' 외국어 교본과 똑같은 형태다.

이 책이 조선 영.정조대까지 꾸준히 개정되고 전문 통역관(譯官)들의 교과서로 활용된 것은 이런 뛰어난 실용성 때문이었다. '노걸대'가 초급 수준의 회화책이라면 함께 활용된 '박통사'(朴通事)는 상대적으로 고급 단계 교본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노걸대는 요즘 표현으로 '중국통'쯤으로 해석된다. 이른바 '원본'은 정 교수에 의해 1998년 국내 학계에 처음 소개됐다. 정 교수는 "1346년 무렵 원(元)대 중국을 여행한 고려인에 의해 저술된 것을 후대인 조선 초기에 목판본으로 간행한 것으로 원본의 모습을 대부분 간직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전까지 가장 빠른 판본은 조선 성종 14년(1483) 기존 판본을 대폭 줄이고 고친 '산개(刪改) 노걸대'였다. 가장 널리 통용된 것으로는 중종 10년(1515년) 역관 최세진(崔世珍)이 한글 번역을 붙여 발행한 '번역(飜譯) 노걸대'가 있다.

이 책의 가치는 무엇보다 당시의 생생한 중국어와 고려.조선시대 외국어 교육 실상을 보여주는 데 있다. 당시의 상업발달 상황.대륙과의 교역 등 시대상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는 점도 의미가 크다.

조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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