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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Biz] CEO들, 문화·예술에 길을 묻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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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서울 구로디지털단지 내 소프트웨어 개발업체 넥서스커뮤니티의 신제품 발표회는 한번은 토크쇼, 한번은 뮤지컬 공연이었다. 지난해 서울 시내 호텔을 빌린 뮤지컬 공연에서는 배우가 된 젊은 직원들이 화려한 조명, 빠른 비트의 음악과 더불어 춤추고 노래했다. 600여 명의 초청 고객 앞에서 회사 제품의 탄생 과정과 개념을 유쾌하게 드러내려는 것이다. 이른바 ‘컬처노믹스’ 마케팅.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최고경영자 문화·예술 과정 수강생들이 ‘김남윤의 영재교육 현장’ 강좌에서 청소년 영재 바이올린 주자들의 합동 연주(왼쪽 위)를 듣고 열띤 박수를 보내고 있다. 왼쪽 아래는 ‘한국 전통음악의 이해’ 강좌의 봉산탈춤 실습 장면.

수염을 기른 예술가풍의 양재현(50) 대표는 “정보기술(IT) 제품의 개발과 홍보에도 스토리텔링 기법이 긴요하다. 엔지니어도 디자이너 마인드를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달 초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의 6개월짜리 ‘최고경영자 문화·예술 과정(CAP)’에 등록해 ‘감성경영’의 내공을 키우고 있다. 문화·예술에 대한 이런 ‘열공’ 분위기가 재계에 잔잔히 번지고 있다.

◆인기 더하는 문화·예술 과정=매주 월요일 오후 6시30분이면 기업인과 금융인, 국회의원, 고위 공무원, 변호사들이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으로 하나둘씩 몰려든다. 우면산 자락의 이곳 한예종 강의실에서 CAP 과정 수업이 있는 날이다. 음악·연극·무용 등에 관한 이론 시간에 이어 2교시는 늘 흥겨운 실기교육이다. 김남윤 음악원장, 안숙선·김선희 교수 등 간판 교수진이 직접 강의에 나선다. 2003년 시작된 CAP 과정은 지난해까지 350여 명을 배출한 데 이어 올해 8기 52명이 4~10월 25주 동안 공부하고 있다. 대개 2 대 1 이상의 입학 경쟁률을 보여 4수 끝에 입성한 사람이 있을 정도.

서울 세종문화회관이 주관하는 ‘세종르네상스’ 문화·예술 CEO 과정에도 지도급 인사들이 몰렸다. 지난해 말과 올 초 두 차례 70여 명씩 모집했는데 경쟁률이 평균 3 대 1이었다. 엇비슷한 프로그램이 많이 생기는 바람에 수강생 모집에 골머리를 앓는 일반 경영대학 CEO 과정 관계자들의 눈에는 부럽기 짝이 없다. 주로 경영·경제학 이론이나 경영기법·리더십 등을 가르친 대학 CEO 과정은 점차 문학·역사·철학을 논하는 인문학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던 것이 경영과 문화·예술의 접목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런 과정에는 공부하는 쪽이나 가르치는 쪽이나 유명 인사가 많다. 이번 학기 CAP 과정에는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이종상 화가, 황병기 이화여대 명예교수, 김덕수 한예종 교수, 김훈·신경숙 작가 등이 강사로 나선다. 역대 CAP에는 김승유 하나금융그룹 회장, 남상태 대우조선해양 사장, 오남수 금호아시아나그룹 사장 등이 거쳐갔다. 세종르네상스 ‘학생’들의 면면도 눈에 띈다. 1기에 윤영달 크라운해태제과 회장, 김종섭 삼익악기 회장, 고은아 서울극장 대표가 몸담았다. 지금 2기에는 문훈숙 유니버셜발레단장, 어윤대 국가브랜드위원회 위원장, 강석진 CEO컨설팅그룹 회장 등의 이름이 눈길을 끈다. 서울대의 ‘문화콘텐트 글로벌 리더과정(GLA)’도 최근 5년째 입학생을 맞았다. 문화·예술 CEO 과정이 인기를 모으자 중앙대·한양대·서울예술대·전국경제인연합회 등도 유사 과정을 신설하거나 강화할 움직임이다.

◆창의와 다양성의 산실=CEO들이 바쁜 틈을 쪼개 문화·예술 활동에 뛰어드는 건 왜일까. CAP 과정의 성기숙(한예종 전통예술원) 주임교수는 “CEO를 비롯한 사회지도층이 이제 문화·예술 쪽에 길을 묻기 시작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경제위기와 같은 불확실성이 증대되고, 콘텐트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과학적 사고를 보완하는 감성경영이 각광받기 시작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콘텐트·디자인·기업문화 같은 미래성장의 소프트파워들은 문화·예술에 대한 애착과 안목 없이 얻기 힘들다는 것이다.

지난해 7기 CAP 과정의 동문회장인 임진혁 동연산업 회장은 “자연스레 문화·예술의 애호가이자 후원자가 된 것 같다”고 웃었다. 먹자판 회식 대신에 공연표를 대량 구매해 임직원들에게 선사하는 일이 늘었다. 식사나 술자리 접대도 공연이나 전시회를 관람하는 문화접대로 바뀌기 시작했다. 같이 공부한 구혜원 푸른저축은행 회장은 직원들의 ‘푸른코러스’, 일반 주부들의 ‘푸른여성합창단’을 결성해 고객과의 소통과 사회공헌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있다. 박종욱 호성케멕스 대표는 “CAP 과정 사진반 특별활동에서 찍은 작품사진을 노조위원장에 선물했더니 좋아하더라. 문화·예술 사랑이 노사화합을 일구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정통 포스코맨으로 올 들어 IT 자회사 포스데이타를 맡게 된 박한용 대표는 이번 CAP 8기 과정에서 숙원이던 드럼을 신나게 배워 보겠다고 들떠 있다. 그는 “중후장대 산업인 철강에 오래 종사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성품이 무겁고 보수적이 된 것 같다. 소프트파워와 창의성이 강조되는 시스템통합(SI) 업체를 책임지게 된 만큼 한번 변신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문화마케팅의 전도사로 알려진 좌상봉 롯데호텔 사장은 세종르네상스 2기생이다. 그는 “여러 나라 사람이 모이는 호텔이야말로 문화를 마케팅에 활용할 기회가 충만한 곳”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롯데호텔은 서울시내 한복판에 자리 잡아 외국인 투숙객들한테 한국의 ‘문화 게이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좌 사장은 1월 설 연휴에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외국인들을 겨냥한 ‘민속놀이체험 한마당’을, 이달 초순 황금연휴 때는 ‘한국문화체험 한마당’을 개최했다.

한국메세나협의회의 이병권 사무처장은 “기업이 단순히 원가를 낮춰 이윤을 남기는 시대는 지났다. 문화·예술로부터 받을 수 있는 창의성과 다양성·미래지향성을 바탕으로 제품과 서비스의 부가가치를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홍승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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