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봄의 작가]10년만에 붓을 든 박태순씨…본격소설 '님의 그림자'집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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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겨우내 원고와 씨름하다 문 열고 나와보니 산수유가 잎도 없는 맨몸에 노랗게 꽃망울을 터뜨렸다.

문민정부 들어서고 사회가 한창 달떠오르던 1993년 작가 박태순 (朴泰洵.56) 씨는 서울을 등지고 충북 수안보로 잠적했다.

60~80년대 좀더 나은 사회를 위한 순정들은 어디로 가고 세속성에 물들어가는 세태가 꼴 사나워 초야에 묻혀버린 것이다.

그런 그가 올 봄 전혀 달라진 2편의 장편 소설을 선보인다.

64년 '사상계' 로 등단한 박씨는 처음에는 소설에서 서구적 세련성을 추구하는 예술지상주의자였다.

그러다 이내 현실참여 소설로 들어와 87년 6월항쟁을 다룬 '밤길의 사람들' 까지 소설과 행동으로 왜곡된 역사와 현실과 싸웠다.

그런 그가 이제 지식인 사회의 위선과 그 정반대의 순정을 다뤄나갈 장편 '님의 그림자' 첫회분을 '실천문학' 봄호에 선보였다.

"한 시대가 지나갔다.

/그 시대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상처는 그리움으로 남는다."

장편 '님의 그림자' 는 '시대의 상처' 와 '그리움' 의 본질을 찾아나서게 된다.

4.19로 부터 열린 억압과 독재 그리고 거기에 대항하던 민주를 향한 순정한 의지는 93년 문민정부 수립으로 끝났다.

한 시대가 끝났지만 무수히 죽고 상처받은 마음들은 어떤 평가도 못받은 채 사회와 역사로부터 매장되고 엉뚱한 사람들이 그 영광을 대신하고 있다고 박씨는 자신이 지나온 시대를 생각한다.

해서 자신의 세대가 목숨 바쳐 추구했던 사회를 향한 순정한 마음, 그것을 님에 대한 그리움으로 빗대 다시 우리들에게 돌려준다.

선비의 인물화에서 민중의 인물화로의 전환을 어떻게 한국화로 마감처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50대의 한국화가 김광중. 이미 잃어버렸으나 잊어버릴 수는 도저히 없는 그리움을 찾아서 이제 막 시인의 길로 접어든 마흔 어름의 이명주. 이 남녀 주인공이 '님의 그림자' 를 이끌어가며 우리 시대의 세속성을 풍경화처럼 보여주면서 그래도 인간과 사회를 위해 간직해야할 정신의 에스프리를 시적으로 드러내게 된다.

이 작품과 함께 박씨는 전작으로 장편 역사소설을 쓰고 있다.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현재 우리의 분단문제를 뿌리부터 다시 한번 살펴보게 하겠다는 것이다.

"역사의 통과의례에 난파당해버린 사람들의 진실을 아직 우리는 연인처럼 아로새겨야만한다.

사랑의 상상력이 이런 시대의 상처를 아물게하고 또 하나의 시대를 낳게한다.

소설도 이제 비판이나 투쟁보다 사랑을 되찾아야 한다.

소설은 이제 다시 소설로 되돌아가야 한다."

10년의 긴 침묵 끝에 다시 본격 소설을 발표하며 박씨는 소설의 소설성을 깨우치고 있다.

독자에게 격조 높은 양식을 주면서도 잘 읽히는 소설을 위해 한겨울을 보낸 박씨의 봄, 산수유의 노란 꽃망울은 새로운 세계의 열림과 떨림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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