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13> 류사오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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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사오치가 1961년 4월 농촌조사 도중 현지 농민과 좌담회를 하고 있다. 김명호 제공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 겸 국방위원회 주석 류사오치(劉少奇)는 현장조사를 중요시 여겼다. 석연치 않은 사안이 발생하면 직접 현장을 찾아 의문이 풀릴 때까지 조사를 멈추지 않았다. 현지 관원들이 길바닥에 나와서 영접하거나 배웅하지 못하게 했고, 밥 먹는 자리를 만들어 훈시 따위를 하지 않았다. 참관 지역을 안내하고 설명한다며 앞뒤로 몰려다니는 짓도 못 하게 했다.

1961년 4월 2일부터 44일간 후난(湖南)성의 2개 지역에서 현지조사를 실시했다. 한 여인이 중난하이(中南海) 벽에 붙인 ‘반동 표어’가 계기였다. 60년 여름 후난성 리위장(鯉魚江) 화력발전소 여공 류구이양(劉桂陽)은 동생의 편지를 받았다. “마을 공동식당에서 밥을 먹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온몸이 퉁퉁 붓고 자리에서 일어나지를 못한다. 소금 살 돈도 없다”는 내용이었다. 2년 전 ‘대약진운동’이 시작됐고 몇 달 전만 하더라도 마오쩌둥 주석은 1800만t의 철강과 6000억 근(斤)의 양식을 위해 “계속 약진하자”고 호소한 바 있었다. 전국적으로 형편이 좋아졌다는 보도가 하루도 빠지지 않을 때였다. 류구이양은 휴가를 신청했다.

집에 온 첫날 그를 맞이한 것은 고모의 자살과 묽은 죽이었다. 몇 알 떠 있는 낱알들이 애처로웠다. 다음 날 숙부를 찾아갔다. 부엌에 돼지사료용 잡초가 쌓여 있었지만 돼지는 보이지 않았다. 거리에는 팔이 뒤로 묶인 채 꿇어 앉아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고구마를 훔친 죄였다. 2박3일 동안 보고 들은 것을 종합해 봤다. 원인은 인민공사와 공동식당이었다. 마오 주석에게 일러바치기로 결심했다. 은행 잔액 100원을 인출해 붉은 종이와 필기구·반창고를 구입했다. “인민공사 타도하라!” “모두를 굶겨 죽이는 인민공사” “인민공사가 싫다” 등 12개의 표어를 단숨에 휘갈겨 썼다. 남편에게는 먼 길을 떠난다는 편지를 남겼다.

베이징에 도착한 류구이양은 천안문으로 직행했다. 마오 주석의 집이 근처에 있다는 얘기는 익히 들어왔지만 어찌나 넓은지 찾을 길이 막막했다. 주변을 헤매다 보니 온갖 표어가 다 붙어 있었다. 자신이 만든 것과 유사한 내용의 표어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제발 부탁이다. 여자들 화장 좀 하고 다녀라”는 싱거운 내용의 표어도 있었다. 오후 늦게야 주석이 중난하이에 산다는 것을 알고 달려갔다. 이를 악물고 보따리 속에서 표어와 반창고를 꺼냈다. 반듯하게 붙인 후 위병소로 향했다. “방금 담벼락에다 표어를 붙였다. 당 중앙과 주석에게 농촌의 실정을 알리기 위한 것이니 전달되도록 해라.” 간부로 보이는 사람이 나오더니 따라오라고 했다.

류구이양은 자신 있었다. 마오 주석은 “조사를 하지 않은 사람은 발언권이 없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왜 반동 표어를 붙였느냐’는 신문에 그는 “당 중앙과 마오 주석에게 농촌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서”라는 말만 반복했다. 류구이양은 반혁명죄로 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4개월 만에 석방됐다. 류구이양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를 구출해 준 사람은 국가주석인 류사오치였다.

류사오치는 ‘공안공작보’를 통해 사건을 알고 있었다. 반동 표어가 분명했지만 국가 지도자에 대한 신뢰와 희망의 표현이었다. 법원의 판결을 예의 주시했다. 형이 확정되자 “법은 실사구시(實事求是)의 구체적 표현이다. 실제 상황을 엄밀히 조사한 후에라야 시비(是非)를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류구이양 사건은 다시 조사할 필요가 있다”며 직접 현장조사에 나섰다. 밥그릇과 젓가락을 챙기고 손수 짐을 꾸렸다. 유격전을 벌이러 나가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현장에 도착한 류사오치는 화장실들을 골고루 다니며 인분을 수거해 나뭇가지로 세밀히 헤쳐 보고 냄새를 맡아 봤다. 곡식을 먹은 사람들의 대변이 아니었다. 돼지농장에는 말라빠진 암퇘지 3마리가 고작이었다. 인민공사의 공동식당에는 양식이 단절된 지 오래였다. “사람이 굶어 죽는 판에 돼지에게 먹일 양식이 있겠느냐”며 하소연하는 촌민이 있었다. 반당, 반사회주의자로 몰릴까 두려워 말을 못 하던 기층 간부들도 입을 열기 시작했다. 류구이양의 주장은 사실이었다. 류사오치는 현지의 인민공사와 공동식당을 폐쇄시켰다. 류구이양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듬해에 열린 ‘7000인 대회’에서 류사오치는 인민공사와 대약진운동의 결점과 착오를 지적하며 자아비판을 철저히 했다. 마오와의 관계에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문화혁명이 발생하자 류사오치는 몰락했다. 모든 당직과 관직을 박탈당했다. 류구이양도 다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류사오치는 온갖 오명을 뒤집어쓰고 세상을 떠났다. 한 무명 시인은 “두견도 인간 세상의 한(恨)을 알았는지, 해마다 청명절이 오면 피를 쏟았다”며 공화국 주석의 한을 달랬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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