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영희와 점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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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2007년 4월, 화가 김점선은 난소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그는 곧바로 친구 장영희(서강대 교수)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축(祝) 암’. 영희는 싫다는 그를 억지로 끌고 가 건강검진을 받게 한 당사자였다. 점선은 “(척추암과 싸우느라) 자기도 아파 죽겠으면서 애쓰는 게 짠해” 아들 낳고 30여 년 만에 병원을 찾았었다. 둘은 사이 좋게 투병했다. 때가 되자 사이 좋게 눈을 감았다. 영희 57세, 점선 63세. 영희가 떠난 9일은 점선의 49재였다.

둘은 예닐곱 해 전 피아니스트 신수정(전 서울대 음대 학장)의 ‘식탁 친구’로 만났다. 생긴 것도, 말하는 품새도 전혀 다른 두 사람은 기실 서로 닮은꼴임을 단박에 알아봤다. 섬세하고 눈물 많은 영희는 고통으로 담금질된 집념의 파이터이기도 했다. 얼핏 싸움닭처럼 뵈는 점선은 속맘이 우유에도 녹을 스펀지빵이었다. 둘은 ‘착함’을 지상 최고의 가치로 쳤다. 나이 먹어도 천박해지지 않기를 소망했다. 위선과 꿍꿍이를 단호하게 싫어했다. 점선은 말했다. “우린 철길처럼 평행을 유지하며 쭉 뻗어가는 사이야. 어느 한쪽에 기대거나 구부러지는 그런 우정이 아니야.” 영희는 화답했다. “평범한 것도 김 선생님 눈으로 보면 기막힌 광채가 뿜어져 나와요. 정말 훌륭한 예술가시고, 정말 훌륭한 인간이세요.” 무엇보다 둘은 함께 있으면 즐거웠다. 깔깔, 호호, 큰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스무 시간 얘기해도 더 할 말이 있었다.

암은 이들의 위트·열정·생명력·백치 같은 낙천성… 그 무엇 하나 상처 내지 못했다. 영희가 2001년 홀로 미국에서 첫 암수술을 받을 때였다. 마취의가 어색한 한국말로 ‘한나, 뚜울, 쎄엣’ 수를 세자 그만 웃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단다. 소설가 박완서는 점선에게 “너처럼 까부는 암환자는 처음”이라며 “좀 비관적이 되는 법도 배우라”고 혀를 찼다. 두 사람은 병실에서도 끊임없이 미래를 계획했다. 정신 놓기 직전까지 마지막 책의 교정을 봤다. 몇 년 전 “평생 잠자야겠다고 맘먹고 잔 적이 없다”는 영희에게 점선은 말했었다. “너 인생을 압축파일로 살았구나.”

둘이 참 좋아한 W H 오든의 시 ‘슬픈 장례식’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는 나의 북쪽이며, 나의 남쪽, 나의 동쪽과 서쪽이었고…’. ‘동쪽’과 ‘서쪽’을 한꺼번에 잃은 수정은 말한다. “그래도 난 복이 많지요. 그들이 내 친구였으니.”  

이나리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