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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대통령의 입' 9년] 35. 톰슨 경의 충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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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 1979년 6월 방한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右)과 박정희 대통령이 공항에서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의기가 투합해 대화가 재미있었던 외국인과는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기회 닿는대로 자주 만났다. 영국 전략문제연구소 고문인 로버트 톰슨 경의 경우도 그러했다. 그가 두 번째로 박 대통령을 만날 땐 나는 주선만 하고 동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통령과의 면담이 끝난 후 톰슨 경은 나의 사무실로 찾아와 자기가 대통령에게 말한 내용을 설명해주었다. 대통령의 발언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신사다운 면모였다.

유신 하반기였던 당시 우리 정부는 미국과의 관계가 꼬일대로 꼬이고 있었다. 요즘의 한.미관계와도 흡사했다. 그러나 그 원인은 안보 문제가 아니었다. 카터 정부는 유신정권의 인권을 문제삼고 있었다. 갈등의 원인이 안보가 아니라 해도 양국 관계가 안 좋으니 일반 국민이 불안해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톰슨 경은 어두운 표정으로 "요새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퍽 걱정 되는군요"라고 말문을 열었다. 이것으로 나는 그가 박 대통령과 어떤 주제로 얘기를 나누었는지 쉽게 추정할 수 있었다. 톰슨 경은 영국과 미국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요령있게 더듬어 내려갔다. 미국이 독립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영국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미국에 대한 감정과 인식의 변화 등을 주섬주섬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영국 사람들은 과거의 영광을 잠시 제쳐두고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굳게 유지했기 때문에 2차대전에서 나치와 일본 군국주의를 물리칠 수 있었으며, 그 뒤 전후 질서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도 소련의 팽창주의를 막아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오."

그러면서 그는 한국에 대해 충고했다. "한국 입장에서 보면 진실로 한국을 도울 수 있는 나라는 미국 이외에는 없어요. 일본이 한국을 돕겠소, 아니면 중국이 한국을 돕겠소? 역사적 경험을 잊지 마세요. 한국이 지금 박 대통령의 선견지명으로 공업화에 성공하여 유사 이래 처음으로 잘 사는 나라를 이룩했지만 세계적 수준에서 보면 강대국이라 자만할 정도는 되지 못합니다. 한국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너무 일찍 자만에 빠지지 마세요. 한국이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멉니다. 미국이 아니꼽더라도 참고 이겨내야 합니다. 지금 이룩해 놓은 자그만한 것에 도취하여 앞으로의 큰 것을 놓치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마세요.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계속 굳게 유지하도록 노력하세요. 우리 영국 사람도 아니꼬운 일들을 참았습니다. 한국 사람이 왜 참지 못합니까. 미국과 계속 손을 잡고 나가야 합니다."

나는 톰슨 경의 말을 조용히 듣기만 했다. 나도 젊은 혈기에 미국의 내정간섭적 태도에 격분했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톰슨 경의 말을 들으면서 나의 단견을 뉘우치지 않을 수 없었다. 톰슨 경은 "내가 이런 얘기를 했노라고 대통령께 말씀드리세요"라며 나와 굳은 작별의 악수를 했다. 세계 최강국의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국익을 위해서라면 아니꼬운 일을 참아야 하는 것이 선량한 대통령의 직무이던가.

김성진 전 청와대 대변인·문공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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