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인도네시아]1.루피아화 폭락 속수무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인도네시아의 정치.경제불안이 극도로 악화되면서 아시아 경제가 다시 한번 금융위기에 빠질 것이라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 (IMF) 이 요구하는 개혁을 거부한 채 폭도들의 중국인 재산 약탈 등 혼란이 이어지고 있는 인도네시아는 16일 루피아화가 폭락, 금융위기가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불안은 필리핀.태국 등 인접 아시아 각국의 화폐가치 하락을 불러일으키면서 이번주 안에 아시아에 금융위기가 재연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우려가 높아가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 정부와 금융계는 60억달러에 달하는 인도네시아에 대한 대출 및 투자금 회수를 위한 노력을 가속화하고 있다.

루피아화는 이날 고정환율제 도입에 따른 불안감이 확산되면서 자카르타 외환시장에서 지난 주말의 달러당 8천2백루피아에서 약 22% 떨어진 달러당 1만5백루피아에 거래됐다.

IMF가 인도네시아가 고정환율제를 강행할 경우 4백30억달러의 구제금융을 중단할 것이라고 밝힌데 자극받은 것이다.

이같은 하락세는 당분간 계속 이어질 전망. 영국의 경제조사기관인 IDEA의 싱가포르 주재 통화전문가 니잠 이드리스는 "곧 1만2천루피아까지 하락할 것" 이라고 예상했다.

한편 이날 루피아화 폭락의 영향으로 필리핀 페소화는 지난 주말보다 3.8% 하락한 달러당 41.88를 기록했으며 태국 바트화도 달러당 47.90에 거래됐다.

홍콩 주식시장도 항셍지수가 지난 주말보다 2% 떨어졌다.

이와 관련, 우리 정부는 지난 주말 인도네시아 채권협상단 단장인 멀빈 데이비스 스탠더드 차타드 은행 아시아지역 본부장에게 한국도 협상대표에 포함시켜 줄 것을 공식 요청했다.

또 동남아 중앙은행기구 (SEACEN) 총재회의 참석차 인도네시아를 방문중인 이경식 (李經植) 한은총재는 이날 레디우스 프레와르 민간외채협상지원단장을 만나 한국 금융기관의 대출금을 조속히 상환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처럼 위기는 갈수록 심화하고 있으나 인도네시아 정부는 아직 적극적인 대응책을 마련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의 분위기는 한마디로 무력감과 체념에 빠진 상태다.

지난달 8일 자바섬에서 시작된 주민 폭동은 한달이 넘도록 수그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고 폭동 발생 지역만도 16일 현재 20여곳에 이른다.

그럼에도 16일 오후4시 자카르타에서 만난 한 택시 운전기사는 현 사태에 대해 말하기조차 싫어하는 듯했다.

그저 자카르타 외곽지역이 좋지 않다 (bad) 는 말 한마디 뿐이었다.

구체적인 폭동상황은 이날 하루종일 수소문해 만난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으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최근 혼란이 가장 심했던 자카르타 서부 파마누칸에서 장사하다 자카르타로 도망쳐왔다는 그는 목숨을 잃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인구 3만명의 파마누칸 지역에서만 지금까지 상점 70개, 교회 6개, 대형 레스토랑 12개가 폐허로 변했다고 한다.

"마치 태풍이 지나간 것 같았다.

폭도들은 모든 것을 쓸어가 버렸다.

집에 있다간 큰 일 날 것 같아 파노라마 호텔로 피신했는데 폭도들이 호텔로 밀려들었다.

모두 독한 술 냄새가 났다.

이들은 물건을 들어내고 불을 질렀다.

삽시간에 객실 41개가 모두 난장판이 됐다.

방에 있는 TV.냉방기는 모두 뜯겨져 나갔다.

〈진세근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