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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빈 칼럼]구월산, 장길산, 황석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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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평양에서 한 시간 남짓 고속도로를 달리면 사리원이고 사리원을 오른쪽으로 끼고 곧장 가노라면 재령군.신천군.안악군에 속한 넓디 넓은 재령평야가 나온다.

그 끝 가장자리에 수묵화처럼 아스라히 자태를 나타내는 산이 구월산이다.

“봉산 은파장은 대동강의 지류인 월단강이 흘러 재령의 나무리 벌을 이루고 강이 세 갈래로 갈라진 어귀에 있으니 강과 평야를 낀 수륙교통이 편리한 곳이다.

단오장은 해서에서도 가장 큰 장이라, 서흥.기린.재령.신천.안악.황주는 물론이요, 평양과 해주에서까지 상인들이 모여 들었다.”

작가 황석영 (黃晳暎) 이 그의 역작 '張吉山' 에서 그린 의적 장길산의 활동무대가 바로 이곳이다.

지난해 12월22일 안악3호 고분을 살피고 구월산 월정사로 가는 진흙길 차속에서 나는 감옥 속의 황석영을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 평양 역사박물관에서 안악3호 고분의 재현 모델을 봤을 때 아!

이것이 고구려다 하며 나는 감전하듯 놀랐다. 남북 33m 동서 30m의 무덤 속 벽면에 가득 찬 벽화 속엔 고구려왕이 백라관을 쓰고 정사를 보는 장면, 시녀를 거느리고 나들이가는 왕비, 개고기.돼지고기가 걸려 있는 육고간, 기중기처럼 물을 퍼 올리는 우물터, 마구간, 그리고 지붕 위의 까마귀 한 마리 등이 고구려인들의 삶의 모습을 생생히 전하고 있었다.

그곳에 가보고 싶다.

이래서 나는 여기까지 온 것이다.

5년에 걸친 대하 역사소설을 쓰면서 작가 황석영은 장길산의 활동무대인 이곳에 얼마나 오고 싶었을까. 오지 않고서도 그는 황해도 땅의 풍물과 민초들의 삶을 어떻게 그처럼 생생하게 그렸을까. 나는 왕의 무덤을 통해 역사를 보려 했는데 그는 어째서 알려지지 않은 비천한 사람들을 통해 역사를 재현하려 했던가.

역사를 체제의 틀 속에서 보려 하는 보수적 수구세력의 한 사람일 나는 합법적 경로를 거쳐 북한땅을 천연스레 밟고 다니고, 민중의 삶을 통해 우리시대를 상징하고 싶다던 진보적 상상력의 예술가는 5년째 감옥생활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자책도 했다.

황석영은 '張吉山' 을 쓰기 시작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알려지지 않은 비천한 사람들을 통해 이른바 역사소설을 쓰려 한다.

한 시대가 다른 시대 속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일들에 관한 기록으로서 우리 시대를 상징화하고 싶다.”

암울했던 70년대의 군사독재 속에서 그는 장길산을 통해 민중의 역사를 재현하려 했고 분단을 넘어 또다른 사회의 삶의 모습을 보려는 강한 작가 의지를 이미 그때 보였다.

그의 월북은 실정법을 뛰어넘는 예술가적 충동이고 그의 작품을 위한 체제도전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에게는 국가보안법 중 탈출.금품수수.국가기밀누설 등 11개의 죄목이 적용돼 7년형을 받아 2000년 4월에야 풀려나게 돼 있다.

우리 같은 보통사람이야 법과 현실을 먼저 생각하지만 뛰어난 예술가는 자신의 상상력과 작가적 충동욕구에 따라 몸을 먼저 던진다.

그래서 나는 진정한 예술가를 존경한다.

황석영이 월북해 무슨 일을 했는지는 소상히 모른다.

그러나 그의 북한 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 를 보면 금지된 땅의 사람 모습을 처음 우리에게 알려준 작가의 의도가 충분히 엿보인다.

법이란 현실이다.

현실 규제를 벗어났다면 어떤 형태로든 벌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황석영 같은 예술가에게 있어 법과 현실은 어느 정도의 유연성을 보여야 한다.

방북 이후 외국을 떠돌던 황석영이 감옥행이 정해진 서울로 되돌아오면서 “구속수감의 고초를 달게 받고 빨리 모국어로 글을 쓰고 싶다” 고 말했다.

그는 소설을 쓰기 위해 월북했다가 다시 소설을 쓰기 위해 감옥행을 택한 것이다.

우리 같은 보통사람이야 닷새도 견딜 수 없는 감옥생활을 그는 지금 5년째 치르고 있다.

5년 동안 작품활동이 중단된 것이다.

그만하면 되지 않았을까. 다른 시대의 역사현장을 보고 싶었기 때문에 법의 울타리를 넘었고 다른 체제, 다른 사회의 모습을 보기 위해 분단의 벽을 넘었던 예술가적 충동이 치러야 했던 대가는 이제 충분하다고 본다.

이데올로기를 떠나 오로지 작품만 쓰겠다는 작가 황석영의 외로운 외침을 우리 보통사람들은 이제 받아들일 때가 된 것 같다.

이제 그의 글을 읽고 싶다.

권영빈 〈논설위원·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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