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착같은 흔적’ 하나 더 남기고 떠난 장영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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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 세상에서 나는 그다지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평균적인 삶을 살았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그다지 길지도 짧지도 않은 평균 수명은 채우고 가리라. 종족 보존의 의무도 못 지켜 닮은 꼴 자식 하나도 남겨두지 못했는데, 악착같이 장영희의 흔적을 더 남기고 가리라….” (‘희망을 너무 크게 말했나’ 중에서)

9일 타계한 장영희 서강대 교수는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것처럼 평균 수명은 다 채우지 못했다. 대신 ‘악착같은’ 자신의 흔적을 오롯이 남기고 떠났다. 12일 출간 예정인 수필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샘터)이 유작이 됐다. 고인은 3월 30일 출판사에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포함한 원고를 넘기고, 입원 중에 마지막 교정지를 받아 4월 30일 검토를 마친 원고를 출판사에 보냈다. 그러나 책 인쇄가 끝난 8일에는 이미 의식을 잃은 그는 제본돼 나온 책을 펼쳐보지 못했다.

장 교수가 2000년 이후 월간 ‘샘터’에 연재한 글을 모은 이 책에는 생애 마지막 9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아홉해 동안 그는 보통 사람이 한 번도 감당하기 어려운 암 판정을 세 번이나 받았다. 그런데도 2000년 출간된 수필집 『내 생애 단 한번』에서 보여준 따뜻한 감성과 여유로운 재치는 전혀 빛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평범한 일상을 경이롭게 바라보는 시선엔 그 특유의 솔직함이 애틋하게 묻어나 있다.

“나는 참 많이 바깥 세상이 그리웠다. 창밖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 아래 드넓은 공간, 그 속을 마음대로 걸을 수 있는 무한한 자유가 그리웠고, 무엇보다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늦어서 허둥대며 학교가서 가르치는, 그 김빠진 일상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그리고 그 모든 일상을, 그렇게 아름다운 일을, 그렇게 소중한 일을 마치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 태연히 행하고 있는 바깥 세상 사람들이 끝없이 질투나고 부러웠다.”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중에서)

책 제목을 짓는데 유난히 집착이 강했던 고인은 이 책이 “기적의 책이 되었으면 한다”며 책 제목에 삶에 대한 희망과 강한 의지를 담았다. “생각해보니 나는 지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기적을 원한다(…)삶의 기적을 나누고 싶다.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기적이고 나는 지금 내 생활에서 그것이 진정 기적이라는 것을 잘 안다.” (‘프롤로그’ 중에서)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바깥 세상으로 다시 나가리라. 그리고 저 치열하고 아름다운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리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 책은 그가 그토록 함께 하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소박한 흔적을 덤으로 남기고 눈을 감았다.

“내가 죽고 난 후 장영희가 지상에 왔다 간 흔적은 별로 없을 것이다. 어차피 지구상의 65억 인구 중에 내가 태어났다 가는 것은 아주 보잘 것 없는 작은 덤일 뿐이다. 그러나 이왕 덤인 김에,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덤이 아니라, 없어도 좋으나 있으니 더 좋은 덤이 되고 싶다.”(‘내가 살아보니까’ 중에서)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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