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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도 우도 개혁보다 표가 먼저, 포퓰리즘의 악순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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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호 20면

지난 1일 폴란드 바르샤바 증권거래소 앞에서 시위대가 “자본주의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바르샤바 로이터=연합 뉴스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북쪽으로 290㎞ 떨어진 그단스크의 레닌 조선소. 1980년대 레흐 바웬사가 이끈 ‘자유노조’의 거점이자 동유럽 공산체제 붕괴를 촉발한 곳이다. 다음 달 4일 이곳에서 열릴 예정이던 ‘자유노조 선거 압승’ 20주년 기념식이 취소됐다. 도널드 터스크 폴란드 총리는 7일 “연일 계속되는 노조원들의 시위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바츨라프 하벨 전 체코 대통령 등 행사에 참석할 유럽 지도자들의 신변 안전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동유럽의 현재- 흔들리는 ‘체제 전환’ 실험

2009년 봄. 동유럽의 거리가 불만과 저항의 기운으로 다시 뜨거워지고 있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동유럽을 강타하면서 실업과 임금 삭감에 고통받는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89년 공산 정권이 붕괴된 이후 최대의 혼란에 직면해 있다고 외신들은 전한다. 20년간 이룩한 정치·경제·사회의 펀더멘털(기초체력)과 미래 비전이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올 들어 동유럽 국가들은 연쇄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우려하는 사태에 몰렸다. 독일 슈피겔지는 “파티가 끝난 뒤 숙취에 시달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AP 등 다른 외신도 “사회주의 그늘에서 벗어나 서유럽 부국을 따라잡으려던 동유럽 국가들의 꿈은 미뤄졌다. 포르셰 스포츠카와 마천루를 자랑하던 도시의 성장이 멈췄다”고 전한다.

91년 옛 공산권 국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유럽부흥개발은행의 토머스 미로 총재는 “동유럽에서 20년간 추진된 개혁이 물거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동유럽 국가들은 그동안 눈부신 고도성장을 자랑했다. 특히 스스로를 ‘중유럽 국가’로 부르며 다른 동유럽 국가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던 폴란드·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와 발트 3국(라트비아·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 일찌감치 서구 체제에 편입한 발칸반도의 슬로베니아는 지난 수년간 성장률이 연 7~10%나 됐다. 체코의 지난해 실업률은 제로였다.

유럽연합(EU)에 가입한 동유럽 10개국 가운데 가장 늦게 합류한 루마니아도 호황을 누렸다. 슈피겔은 “전 세계에서 호화 스포츠카인 ‘포르셰 케인스’를 가장 많이 보유한 나라는 루마니아일 것”이라고 보도했다.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반정부 시위를 조직한 루카 니쿨레스쿠는 “그동안 우리는 고도성장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그것은 폭탄이 든 칵테일이었다”고 주장했다.

대외경제연구원(KIEP)에 따르면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EBRD·EU 집행위원회는 2011년 3월까지 헝가리·루마니아에 각각 200억 유로, 라트비아에 75억 유로를 지원하기로 했다. 동유럽 경제의 충격은 동유럽에 돈을 빌려준 서유럽 은행들이 돈줄을 죄고, 서유럽 사람들이 지갑을 닫으면서 악화됐다. 통화가치는 급락하고 경제고통지수인 물가와 실업률은 급상승했다.

헝가리의 경우 막대한 대외 부채가 가장 큰 골칫거리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외채 비율이 70%에 가깝다. 외채로 몸집을 불린 외형 성장의 한계를 보여준 사례다. IMF는 “옛소련에서 독립한 국가와 동유럽의 전체 경제성장률이 지난해 2.9%였지만 올해 마이너스 3.7%를 기록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영국의 여론 조사기관인 퓨리서치는 최근 “2007년 조사에서 동유럽에서의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지지도가 56%로 낮았다”면서 “이번 경제위기가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됐고 불신이 증폭될 수 있는 의미다 ”고 전했다.
 
“올해 마이너스 3.7% 성장 예상”
이시형 전 폴란드 대사는 “동유럽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정치적 리더십 부재이고 경제위기의 근본 요인”이라고 말했다. 시류에 영합하는 지도자가 많다 보니 동유럽 전체의 존경을 받을 만한 지도자도 거의 없다. 영국의 싱크탱크 로열 유나이티드 서비스의 조너선 이얼 박사는 “동유럽은 충격에 대처할 능력이 없다. 경제는 취약하고 정치는 불안정해 경제위기가 사회 전체의 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동유럽 정치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포퓰리즘과 부패다.

퓨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사회가 믿을 만한가’를 묻는 항목에서 동유럽인들은 91년 당시보다 오히려 10%포인트 넘게 낮은 점수를 매겼다. 반면 서유럽에 속하는 프랑스가 29%에서 45%로, 영국은 55%에서 65%로 높아졌다. 공산 체제가 사라지면 서유럽처럼 잘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컸지만 이젠 냉엄한 현실을 절감하고 있다는 의미다.

동유럽 국가에선 지난 20년간 좌·우파가 번갈아 집권했다. 하지만 어느 쪽도 제대로 된 경제 구조조정을 할 의지가 없었다. 집권을 위해 표밭만 의식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발트 3국이나 중유럽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동유럽 각국에선 선거철만 되면 서유럽 수준의 삶을 원하는 유권자들의 심리를 의식해 의료·주택·연금 등 복지 확대 정책을 고수했다.

IMF는 동유럽에 85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주는 조건으로 각국 정부에 재정긴축을 요구했다. 하지만 순조롭지 않다. 페렌츠 주르차니 헝가리 총리의 경우 당초 IMF에 연금개혁과 공무원 월급 삭감을 약속했다. 하지만 여론이 악화되자 IMF의 경고를 무시한 채 연금과 공무원 봉급을 올리는 쪽으로 선회했다. 이런 ‘오락가락’ 행보가 문제가 돼 그는 결국 자진 사퇴했다.

금융위기가 본격화된 지난해 하반기 이후 루마니아·리투아니아·슬로베니아에선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올 들어 라트비아·헝가리·체코에서도 정권이 무너졌다. 지금까지 6개국이다. 영국 가디언지는 “경제난이 심해질수록 동유럽에서 포퓰리즘이 기승을 부릴 수 있다”며 “포퓰리즘과 민족주의에 기댄 정치 지도자 때문에 민족 분쟁이 발생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동유럽 내부에서도 정치 지도자들이 단기적인 희생을 각오하고 긴축재정을 단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럽 통합 리스본조약 싸고 갈등도
경제위기 이후 EU 회원국 가운데 서유럽 국가와 공산권 출신의 신규 가입국 간에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국내 자동차산업 보호 정책을 언급하고 일부 회원국이 외국인 노동자 쿼터제를 폐지하지 않는 데 대해 동유럽 지도자들은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도널드 터스크 폴란드 총리는 사르코지를 겨냥해 “EU호가 난파 위기에 처했는데, 초과 승선한 배에서 가장 약한 승객을 바다에 던져 넣으려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의회 불신임으로 물러난 페렌츠 주르차니 총리도 3월 1일 EU 정상회담 당시 ‘추가 지원안’이 서유럽 국가들에 의해 거부되자 “새로운 ‘철의 장막’이 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동유럽 국가들은 그동안 ‘유럽공동체’의 일원이 되려고 노력해 왔다. EU·나토 가입, EU의 단일 통화인 유로존 가입을 통해 체제 전환을 완결시키려고 했다. 구 공산권 국가 26개국 중 나토에는 10개국, EU에는 10개국이 가입했다. 유로존에는 슬로베니아·슬로바키아만 들어갔다.

하지만 EU 내부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약한 편이다. 지난해 슬로베니아가 처음으로 EU 정상회담 순회 의장국을 맡았지만 사르코지 대통령의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서유럽 회원국들은 동유럽 지도부에 대한 불신을 숨기지 않는다. 최근 EU의 확대·강화에 부정적인 체코의 바츨라프 클라우스 총리가 EU 의장직을 맡게 되자 EU 전체가 술렁이는 게 대표적인 사례다.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동유럽 국가들이 (EU의) 주요 포스트에서 계속 배제된다면 EU 체제 편입을 원하는 동유럽인들에게 소외감과 저항감을 심어 줘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유럽의 헌법 격인 리스본 조약이 발효될 경우 EU 대통령과 외교정책 대표 등 주요 포스트를 제외한 유럽의회 의장직 정도만 동유럽 국가에 배분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폴란드 국방장관을 지낸 라덱 시코르스키 외교장관 등 동유럽인에게 나토 EU 사령관직을 맡기는 방안도 거론된다.

EU가 따로 놀고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유럽공동체를 통해 동유럽이 완전한 체제 전환을 이룰 수 있다는 시각도 많다. 이미 동·서 유럽이 EU라는 한 배를 탔기 때문이다. 최근 동유럽 경제위기 이후 EU 긴급 정상회담이 세 차례나 열리고, 주요 20개국(G20) 정상회담에서도 동유럽의 경제난이 최대 의제로 논의된 게 이를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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