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인플레 속의 디플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외환 및 금융위기를 겪고 국제통화기금 (IMF) 의 처방전을 받아든 태국.인도네시아와 우리나라는 예외없이 급격한 생산위축과 소비위축이 나타나 디플레의 위험에 직면해 있다.

당장은 기름값이나 생활물가가 매일 올라 인플레가 우려된다.

그러나 일부 품목의 가격인상은 급격한 환율상승의 여파다.

시간이 지나면 지금보다 불황이 심해지고 그 결과 소비위축이 심해져 전반적으로 물가가 하락할 가능성이 높다.

디플레는 물가수준이 전반적으로 하락하는 경제적 현상을 말한다.

금융연구원의 최공필 (崔公弼) 박사는 현재 우리의 경우 부동산과 주식 등 심각한 자산디플레가 진행중이라고 경고했다.

경기불황이 장기화되면 여기에 생산 및 소비위축이 가세할 것으로 예상된다.

사실 우리가 얼마전 뉴욕에서 비교적 성공적으로 2백40억달러의 단기외채를 3년까지 연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디플레가 자국에 전염될 것을 염려한 선진국의 배려도 무시하지 못한다.

태국과 인도네시아의 경우도 비슷하지만 우리도 본격적인 경기침체가 진행되면서 서서히 디플레의 공포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소비수준을 나타내는 도소매 판매액이 지난해 12월 현재 전년동월 대비 4.9%나 감소해 지난 85년 1월 이후 13년만에 처음으로 줄었다.

뿐만 아니라 환율급등의 여파로 기름값이 크게 오르자 자동차판매가 크게 부진해졌다.

또한 차를 이전보다 훨씬 덜 쓰게 되니 레저수요도 덩달아 줄고 관련산업은 위축되고 있다.

실질 가처분소득이 줄어 들어 소비가 준 이유도 있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위세를 떨치는 절약캠페인이 소비심리를 더 얼어붙게 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경제가 위기상황에서 탈출하는데 단기적으로 가장 불안정한 변수는 인도네시아 경제의 붕괴여부다.

일단 민간은행의 모라토리엄이 선언되고 경기위축이 전체 아시아로 퍼지면 정상궤도로의 진입은 그만큼 늦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조용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더 심대한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바로 일본의 디플레다.

일본은 지난 7년간이나 이 디플레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다.

일본에서는 부동산.주식을 포함해 대부분의 상품과 서비스 가격이 떨어져 이것이 미래의 투자와 소비를 주저하게 만드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월스트리트 저널지의 데이비드 해밀턴은 이같은 현상을 "마치 썰물이 빠져나가듯 일본의 가격폭락은 이 나라에 지난 세기 내내 만연된 비효율성과 구조적 결함을 다 드러내놓고 있다" 고 표현했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현재 아시아가 당면하고 있는 금융위기를 잘못된 정책으로 대응하면 대공황 때의 실수를 되풀이할지 모른다고 경고하고 있다.

즉 1930년대의 대공황은 주식가격의 폭락, 보호주의와 미국의 불안정한 은행제도가 소비수요를 박살내자 이것이 기업의 수익을 끌어 내렸고 이것이 다시 생산과 고용을 줄이고 그 결과 가격이 더 하락하는 악순환을 말한다.

현재 일본의 상황은 이와 아주 비슷하다.

지난 91년 이래 도매물가는 5.7%나 떨어졌다.

가장 단순한 경기회복 방안은 케인스가 처방했듯이 이자율을 낮춰 투자와 소비를 자극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일본의 실질금리는 거의 제로에 가깝다. 교과서에나 나오는 '유동성 함정' (liquidity trap)에 빠진 상태다.

우리도 당면한 외환 및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디플레의 덫에 걸리면 안된다.

그래서 별 논리적 근거도 없는 소비절약 캠페인을 벌이는 것은 도움이 안될 뿐 아니라 사고 자체가 구시대적 발상이다.

오히려 가격변동에 따라 합리적 소비를 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놓고 사회적 논의와 홍보를 하는 것이 훨씬 더 시장경제에 맞는 방향이다.

금융개혁을 진행시키면서 소비수요를 급격히 위축시키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된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안좋다.

지난 시절 방만하게 투자하고, 소비했고, 그래서 과다차입을 했기 때문에 오늘의 결과가 왔으니 경기침체와 소비위축이 도움이 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일본경제의 예에서 보았듯 디플레의 해악은 인플레 못지 않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고금리 때문에 금융시장이 역할을 못하면 이럴 때 재정지출의 우선순위를 다시 조정하거나 국채.지방채 발행을 통해 재정의 경기자극 기능을 활성화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장현준〈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