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이동]9.호남에선…시민들 느긋 공직사회 들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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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2.18대선때 김대중 (金大中) 후보에게 95% 이상의 몰표를 몰아주었던 호남. 선거직후 들뜬 분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요즘은 이상할 만큼 조용하다.

'외지인' 들은 특별한 낌새를 감지하지 못한다.

전과 달리 많은 주민들이 느긋해졌음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뉴스를 지켜보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떠올리는 주민들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대다수 지역 주민들은 한 (恨) 풀이에 만족한다고 입을 모은다.

자영업자 金모 (35.광주시북구운암동) 씨는 “고교졸업 후 서울에 올라가 하숙집 구할 때 전라도 출신이라며 방을 주지 않던 뼈아픈 기억이 새삼스럽다.

이제 우리 아이들은 그런 가슴아픈 지역차별은 덜 당하지 않겠느냐” 며 웃었다.

일부 주민들은 막연한 기대감에 가슴설레고 있다.

회사원 이강우 (李康雨.49.전북전주시완산구서신동) 씨는 “그동안 푸대접받아온 호남 출신이 마땅히 우대받아야 한다.

하지만 한이 풀렸으니 큰 욕심내지 말고 金당선자를 도와주어야 할 것” 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풀 벗겨보면 호남지역의 정서는 이런 것만은 아니다.

결코 간단치 않다.

특히 공직사회가 그렇다.

은근한 기대감으로 부풀어 있다.

그러면서도 일부는 DJ가 평소 주장해온 지역 등권론 (等權論) 때문에 '역차별' 당하지 않을까 우려까지 한다.

과거와는 딴판인 행복한 고민이다.

전남지방경찰청 간부 A씨는 “그동안 거친 파도를 타고 능력을 인정받은 소수의 호남 출신 고위직이 아무래도 중용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아랫사람들도 좀 덕을 볼 수 있지 않겠느냐” 며 속뜻을 감추지 않았다.

전북지방경찰청 간부 B씨도 “매년 경무관급 진급자 수를 보면 경상도의 4분의1로 턱없이 적었다.

공정한 인사로 형평을 맞춰야 한다” 고 주장했다.

법조인 C씨는 “과거 검찰총장.경찰청장.국세청장 등 이른바 끗발있는 '자리' 에 호남 출신을 거의 등용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고 목청을 높였다.

반면 전북도청 간부 D씨는 “성실하고 능력있는 호남지역 공무원들이 역차별 등 지역감정에 또다시 휘말려 도태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랄 뿐” 이라며 일부의 성급함을 걱정했다.

이런 저런 물밑의 '조용한 외침' 이 뒤섞여 있는데, 그러나 낮은 목청도 모이면 커지게 마련이다.

발탁.영전 등에 관한 각종 설과 소문이 어지럽게 나돈다.

“누구는 아무개의 추천으로 ○○직에 발탁된다더라” “누구는 DJ의 비선 (비線) 과 접촉했다더라” “아무개는 대통령 취임식 직전 현직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가 새 정권에서 일한다더라” “누구는 차기 정부의 일을 도와주며 기회를 노리고 있다더라” “아무개는 현직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는데 DJ의 집권으로 권토중래 (捲土重來) 를 노리고 있다더라” …. 권력이동은 기업쪽에서도 감지된다.

지난해 광주 첨단과학산업연구단지의 공장용지를 분양받은 17개 업체중 2개 업체는 입주를 포기하거나 공장 면적을 줄이려 했다.

그러나 지금은 뭔가 달라질 것을 기대하며 관망세로 돌아선 것으로 알려졌다.

오는 6월 지방선거에 출마하려는 지역 인사들의 상경 (上京) 도 러시를 이룬다.

DJ의 측근과 접촉한 일부 인사는 “정치 불개입” 이라는 측근의 입장 표명에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혔다” 며 분노한다.

몇몇은 지구당 등을 찾아가 가벼운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하지만 국민회의 지구당은 선거전보다 한산하다.

지구당의 한 관계자는 “어른 (국회의원) 이 서울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줄을 대려는 사람들은 대부분 의원회관과 직거래를 하는 것 같다” 고 말했다.

이유는 다르지만 한나라당 지구당들도 잠잠하다.

과거 여당시절 워낙 강한 DJ바람에 운신을 극도로 조심했던 이들은 이제 세상이 달라졌음을 주민들의 아량과 따뜻한 (?) 눈초리에서 느낀다고 했다.

이같은 일부 지역정서와 관련, 주목을 끄는 것은 학계.시민단체 등의 최근 움직임이다.

광주의 한 대학교수 E씨는 “과거엔 황색바람 등으로 '막대기만 꽂으면 당선되는' 이상한 풍토가 있었던 게 사실이나 앞으론 달라질 것이다.

적어도 여론 주도층의 생각은 그렇다” 고 전했다.

특히 시민단체들은 대선 후 세미나.강연 등을 통해 “호남은 다시 태어나야 한다” 며 주민 계도에 나서고 있다.

시민연대모임 윤장현 (尹壯鉉) 공동대표는 “집권당의 도시인 광주를 비롯한 지역 주민들은 '한풀이식' 기대와 희망보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지방자치의 꽃을 피우기 위해 DJ의 발목을 잡아선 안된다” 고 강조했다.

한편 지방 정가엔 한바탕 회오리가 몰아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그리고 이런 전망은 '단체장 물갈이' 에 대한 무성한 소문과 설로 연결된다.

“아무개는 행정능력은 있지만 정치력이 부족해 이번엔 아웃이라더라” “민주화운동에 적극 동참해 지난번에 기회를 얻었던 아무개는 무능력한 것으로 판정받아 이번 임기로 끝장이라던데” …. 행정력.정치력.전문성이 부족한 단체장들이 찬바람을 맞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렇듯 잘 들여다 보면 호남에선 세상이 달라졌음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도끼눈이 사라지고, 한때 흉흉했던 민심은 찾아볼 수 없다.

정확성은 차치하고라도 속속 전해지는 중앙무대의 정보도 달라진 모습이다.

광주 = 김영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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