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한보매각 하루라도 빨리…금융권 부담덜고 산업 구조조정 촉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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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년전 재계순위 14위였던 한보그룹의 부도는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위기의 서막이었다.

때늦은 바람이지만 당시 한보부도의 원인과 파급효과를 미리 가늠하고 대비책을 마련했더라면 어느정도 국가 경제위기는 예방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보문제의 발단은 상식적 차원에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금융기관들이 무모하리만큼 허술한 사업계획을 받아 들여 빚더미 기업에게 천문학적인 액수의 자금지원을 해준 것 자체가 의문이었다.

이러한 의문은 자연히 한보문제를 정치문제로 비화시켜 정치권과 한보 그리고 금융기관의 밀착관계에 초점이 맞춰졌다.

경제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해결방안도 시장원리로는 풀어 나가기가 어려웠다.

시장원리에 따라 제3자 인수를 추진함으로써 채권단의 피해를 최소화할 필요성은 컸지만 과거처럼 산업합리화업체 지정여부가 특혜시비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 성사되지 못했다.

한보를 인수할만큼 재무구조가 튼튼한 기업도 없었기 때문에 세제감면 등 어느 정도의 정부지원은 불가피했다.

결국 한보부도로 인해 생겨난 부실채권은 은행과 제2금융권의 자금운용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자금시장에서는 신용경색으로 인한 위기감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위기감은 곧 대기업의 추가부도 가능성을 예상케 했고 불행하게도 이러한 예상은 적중했다.

부실채권 증가에 따른 은행위기는 신용경색을 심화시켜 추가부도와 부실채권의 증가라는 악순환을 낳고, 금융기관을 통한 외자조달이 많은 우리나라의 경우 이러한 금융권의 위기는 곧 외환위기로 발전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 결정적인 정책 실수였다.

우리의 외채는 한보사태가 발생할 당시 이미 1천억 달러를 넘어섰으며 그 중 9백억달러 이상이 금융권의 부채였다.

이처럼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점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지난해 1월27일 모국책은행이 발간한 해외자금 조달실적 관련 보고서에서는 이미 96년에 한국 금융기관의 차입금리 상승현상과 차입비용 증가의 원인으로 해외 한국물의 물량 증가와 부실채권 등으로 인해 국내 은행들의 경영상황이 악화되면서 외국 투자자들이 국내은행이 발행한 해외증권을 꺼리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정확하게 지적했다.

문제는 이러한 조기경보가 정책당국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자신있게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책임자도 없었다는 점이다.

은행권의 부실채권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도 명확하지 않았고 자본비율 적정선을 충족하고 있는지도 불분명한 상태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공유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지 못했던 것이다.

한국경제위기의 서막이 된 한보그룹의 부도는 결국 아직까지도 국민 경제에 부담이 되고 있다.

막대한 자금을 들여 투자한 설비들의 가동율이 반에도 못미치며 완공을 위해서는 추가자금이 필요한 실정이다.

한보의 짐을 하루 빨리 덜기 위해서는 제3자 매각을 서둘러야 하고 전체 설비의 매각이 어렵다면 핵심시설을 떼내 국내외에 팔아서라도 채권단의 부담을 경감해야 한다.

자산매각을 통해 금융권의 부담도 완화시켜 주고 산업내의 구조조정을 달성하는 방법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인형 〈LG경제硏 금융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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