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세상보기]교양선택 IMF 언어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시대는 말을 낳고 말은 시대의 성격을 반영하는가 보다.

한국 경제의 명운이 국제통화기금 (IMF) 의 구제금융에 의존하는 시대가 오자 IMF를 접두사 (接頭辭) 로 한 수많은 조어 (造語)가 탄생하고 있다.

이 신조어의 뜻을 잘 알아야만 세상 살기가 수월해진다고까지 말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나 짐작하는데 큰 도움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IMF 언어학은 이 시대인의 교양 선택과목이 되고 있다 (잊지 마시라, IMF 경제학은 필수 선택과목임을) .

1.IMF 한파

제일 많이 쓰이는 이 조어는 일기예보의 바탕이 되는 기상학에서 유래했다.

한파 (寒波.cold wave) 는 고기압의 한랭전선 (寒冷前線) 이 갑자기 밀려와 기온이 급강하하는 현상을 말한다.

느닷없이 닥친 한국의 외환위기를 설명하는 말로는 안성맞춤이다.

또 외환위기가 초래한 경제난국을 포괄적으로 설명한다는 점에서도 적절하다.

기업은 쓰러지고 노동자는 직장을 잃고 물가는 오르고 외국 빚쟁이들은 사상 유례없는 고리채를 요구하고 있는데 어찌 춥고 떨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일부 관공서에서는 이 한파를 이기려고 사무실 난방을 뜨끈드끈하게 때다가 주위의 시샘을 받기도 했다.

IMF 추위.IMF 삭풍.IMF 고통 등의 변형어도 있다.

2.IMF 시대

IMF 한파만큼 자주 쓰이는 용어. 이 시대가 얼마나 오래 갈지 아무도 모른다.

1년반~2년이 통설이긴 하나 5년을 내다보는 견해도 있다.

프랑스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 교수는 정확히 언제쯤 위기탈출이 가능할지 예측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까지 말한다.

정신문화가 질식당한 중세 암흑시대 (暗黑時代.Dark Ages) 는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5세기부터 약 5백년간 계속됐다 (그렇다고 IMF 시대가 이렇게 오래 갈 것 같다는 뜻은 아니다) .그래도 한국인은 IMF 시대의 영문 표기를 왠지 긴 느낌이 드는 에이지스 (Ages) 보다 짧은 느낌이 드는 피리어드 (Period) 로 했으면 좋겠다고 소망한다.

후자에는 종지부란 뜻도 있으니까.

3.IMF 체제

한국 경제가 IMF 양해각서에 따라 운용되는 상태를 말한다.

1997년 12월5일 IMF 상무이사회가 승인한 이 각서는 공식명칭이 'IMF 자금지원 합의서' 다.

한국이 5백70억달러를 융자받는 대가로 서명한 이 합의서는 한국 경제의 구조적 개혁을 강도 높게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을 준수하고 있는지 심사에 통과해야 약속한 돈이 나오게 돼 있다.

이 규정은 한국 헌법처럼 마구 뜯어 고칠 수 있는 게 아니다.

과도한 긴축을 요구한 나머지 한국 경제를 더 죽인다는 비명을 듣고서야 겨우 일부 조건을 완화할 정도다.

IMF 프로그램.IMF 처방.IMF 요구조건 등의 유사어가 있다.

4.IMF 스트레스

부도 걱정, 장사 안되는 걱정, 하고많은 걱정 가운데 제일 큰 걱정은 목 잘리는 걱정이 으뜸. 만약 실직했으면 절대 낮잠을 자지 말라는 충고도 있다.

5.IMF 모델

미모의 광고 모델도 아니고 그녀가 광고 출연료를 깎았다는 얘기도 아니다.

차량 유지비를 줄이려는 소비자들이 찾는 소형차.연료절약형 승용차를 말한다.

“나는 절약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는 사람들도 IMF 시대를 사는 모델로 적당할 것이다.

6.IMF 무풍지대

IMF 한파의 고통을 안 받는 분야. 양극적 측면이 있다.

기술력이 탄탄해 수출이 더 잘되는 회사, 놀면서 국록을 까먹거나 고비용 구조에 안주해도 아무 탈이 없는 일부 정치권을 말한다.

김성호 <수석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