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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우면, 많이 가지면, 몸이 편하면 행복할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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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호 04면

1 수줍게 웃고 있는 치몽의 소녀 2 첫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과일과 계란 선물 3 밭갈이하다가 쉬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

질문 1. 자유로우면 행복한가
팀부는 한 나라의 수도라면 마땅히 있을 법한 것들이 전혀 없다. 고층 건물도, 패스트 푸드점도, ATM 기계도, 신호등도…. 건물은 모두 나지막한 전통 양식이고 사람들은 모두 ‘고’와 ‘키라’로 불리는 전통 옷을 입고 있다. 부탄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자들의 복장 규정이 있는 나라다. 근무시간에는 무조건 고를 입어야 한다는 규정. 내 삐딱선에 다시 시동이 걸렸다. 선생님께 따지듯 물었다.
“복장 규제라니, 선택의 자유가 없잖아요?”

여행가 김남희, 부탄에서 행복의 의미를 묻다 <上>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복장 규제는 부탄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훌륭한 선택으로 보이거든. 무엇보다 나는 그 ‘선택의 자유’라는 말을 별로 믿지 않아. 우리가 정말 자유롭게 선택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뭘 선택할 수 있는 거지?”
“저한테 행복이란 일상의 작은 것들로 이루어지는 마음의 평화와 만족 같은 거예요. 오늘 내가 뭘 입을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 기분이나 날씨에 따라 입을 옷을 고르는 일에서도 행복을 느끼니까요. 부탄은 그런 가장 기본적인 자유를 억압하는 거잖아요.”

4 품앗이 방식으로 함께 지붕을 엮고 있는 남자들 5 탈춤 공연 후 탈을 옮기고 있는 청소년들

“규제가 없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아. 규제가 꼭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니고. 무엇을 규제하느냐가 더 중요한 게 아닐까. 행복해지는 데 옷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지?”
“그래도 전 전체주의적이고 집단주의적인 사고가 싫어요.”
“모든 사회는 집단적일 수밖에 없는 거 아닌가? 우리의 행복 개념은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개념이야. 게다가 개발이나 성장이라는 이름 안에서만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문제고.”
그날 밤, 숙소에서 만난 젊은 청년에게 복장 규제에 대해 물었다. 통렬한 비판을 기대하며.

“부탄이라는 작은 나라의 정체성을 지켜 주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가 복장이라고 생각해요. 이것 때문에 외국인들도 찾아오고, 또 근무시간 외에는 얼마든지 다른 옷을 입을 수 있으니까 괜찮아요.”
나는 언제나 자유에 따른 선택이 삶에서 필수 요소라고 생각하고 살아 왔다. 일상의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
하지만 정말 그런 자유가 있기나 한 걸까. 얼마 전 미국 10대의 70%가 ‘쇼핑이 삶의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 답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소비를 전제하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선택할 자유가 우리에게 있는 걸까(선생님은 우리가 ‘소비하지 않을 자유’를 송두리째 도둑맞았다고 표현했다). 중국산과 수입품이 넘쳐나는 시장에서 건강한 먹거리를 자유롭게 선택할 자유는 있는가? 대형 배급사가 유통과 배급을 독점하는 시장에서 보고 싶은 영화를 선택할 자유가 존재하는지? 하루 평균 72분 게임을 하고 3시간10분씩 TV를 보는 한국인이 자유로운 취미 생활을 선택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위험하다. 자유에 대한 내 확고한 믿음이 도착과 동시에 흔들리고 있으니….

질문 2.많이 가지면 행복한가

패마의 고향은 멀고도 멀었다. 이 나라는 한반도의 5분의 1도 안 되는 크기인데 차를 타고 꼬박 3박4일을 가야 했으니. 해발 고도 3000~4000m의 고갯길을 수도 없이 넘어야 하는 이 나라의 고속도로는 중앙선도 없는 일차로다. 굽이굽이 절벽길이라 속력을 낼 수도 없다. 부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모든 일이 느리게 진행된다고 했다. 느림은 21세기의 화두다. 그렇다면 부탄은 그 지형적 조건만으로도 행복에의 우월한 출발선에 서 있는 걸까. 나흘째 되는 날, 도로가 끝났다. 패마의 고향 마을까지는 이제 산 넘고 물 건너 8시간을 걸어야 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도로도 없는 이 마을의 이름은 치몽. 산들에 둘러싸인 분지로 외부와 완벽하게 격리된 곳이다. 당연히 이 마을이 생긴 이래 이곳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은 우리가 최초. 마을이 한 시간쯤 남았을 무렵, 한 무리의 사람이 향을 피워 놓고 공손한 자세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마치 국왕 부부라도 되는 것처럼 그들과 악수를 하고 돗자리에 앉았다. 귤과 물들인 삶은 계란, 사탕수수와 꽃으로 장식한 바구니(사진2)가 상 위에 놓여 있다.

곧 사람들이 일렬로 늘어서 제각기 담근 방창(막걸리)과 아라(소주)를 건넨다. 이 술들을 다 한 잔씩 마신 후에야 자리를 뜰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세 번의 환영식을 치르고서야 우리는 패마의 집에 들어섰다. 짐을 풀고 나니 동네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바나나·계란·방창과 아라를 들고. 손님과 우리 사이의 대화는 일정한 순서로 반복된다.

손님 : (술을 따르며) 내 아라가 강하지 않더라도 용서해 주기 바라요.
우리 : (잔을 높이 들며) 진폴라!(맛이 좋군요).
손님 : (고개를 저으며) 진푸말라(맛있기는요).

치몽은 한눈에 보기에도 가난한 마을이다. 집 안에 세간도 변변한 게 없다. 사람들의 입성도 남루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표정이 밝다. 순해 보이고 잘 웃는다. 행동은 부드러우면서 당당하다. 무엇보다 매 순간 몸과 마음을 다해 우리를 접대한다.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일이 무서울 정도다.

활쏘기를 구경하려고 발을 멈추면 집으로 뛰어들어가 돗자리를 꺼내 오고, 집 앞을 지나다 인사라도 하면 바로 방창과 아라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 논두렁 길을 걷다 보면 어린 소년이 뛰어와 고 속에 품어온 계란을 수줍게 내민다. 어느 집에서 대접받은 싱족탕이라는 고구마 비슷한 열매가 맛있었다는 말을 하자마자 패마의 형수는 낫을 들고 마당으로 달려갔다. 그날 저녁 밥상에는 한 무더기의 싱족탕이 올라왔다. 이 동네 사람들은 행복해 보일 뿐만 아니라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도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이 동네 사람들은 가진 게 별로 없는데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빈한한 살림마저 기꺼이 나누며 살아가는 듯 보였다. 문득 우리 시대의 유행어인 ‘wish list’나 ‘must have item’ 따위가 생각났다. 나의 훌륭한 선생님은 이렇게 제안했다. “‘가지고 싶은 물건 목록’뿐 아니라 ‘없어도 사는 데 지장 없는 물건 목록’을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 ‘행복이란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덧붙이며.

부와 행복의 상관관계에 대해 우리는 늘 많이 가질수록 행복해진다고 믿어 왔다. 일정한 기간 안에 한 나라가 생산한 재화와 용역을 모두 합한 값인 GNP의 수치가 올라가면 행복도도 커지는 거라고. 모두가 믿어 의심치 않던 경제성장 위주의 행복개념에 최초로 반기를 든 나라가 부탄이다.

부탄의 지그메 왕추크 국왕이 GNH라는 개념을 처음 소개한 건 1973년, 그의 대관식에서였다. 각국의 축하 사절들이 모인 자리에서 20대의 젊은 왕은 “경제적인 대차대조표 대신 국민의 행복도를 기준으로 나라의 발전도를 측정하겠다”고 선언했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은 1968년 봄의 미국 캔자스대. 또 다른 남자는 이렇게 연설하고 있었다. “국가의 목표나 개인적 만족을 단순한 경제적 성장에서 찾을 수는 없다…GNP는 삼나무 숲의 파괴와 호수의 죽음, 네이팜탄과 미사일과 핵무기의 생산으로 증가한다. GNP는 가족의 건강, 교육의 질, 놀이의 즐거움을 포함하지 않는다. 시의 아름다움이나 결혼의 가치, 우리의 유머나 용기, 지혜와 가르침, 자비나 헌신을 측정하지 않는다. GNP는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 주는 것들을 제외한 모든 것을 측정한다.” 존 F 케네디의 동생이자 당시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로버트 케네디였다.

기본적인 물질적 조건의 충족과 자연환경의 뒷받침, 고유의 정체성과 국가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지니는 문화적 환경, 훌륭한 지도자와 정부. 부탄이 꼽는 행복의 기본 조건이다. 경제적 성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영적인 진보라고 믿는 정부라니, 분명 우리가 갖지 못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이 나라의 권력자들은 여러 면에서 상식을 뒤엎는다. 옆 나라 네팔의 국왕이 권력을 내놓지 않으려고 스타일을 있는 대로 구길 때 이 나라 왕은 스스로 물러났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역설하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국민을 설득했다.

왕의 설득에 국민은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아직 정부를 가지기엔 너무 일러요. 권력을 국민에게 넘기는 일에 반대해요. 우린 왕정을 선호한다고요.”(셰프, 왕뒤 지역 농부) 당시 이 나라 사람들의 유일한 스트레스가 선거였다나. 지난해 치러진 부탄 최초의 총선에서는 ‘왕정복고’를 공약으로 내건 당도 있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고 자본주의는 그 끝없는 욕망을 엔진으로 돌아간다. 지금껏 어떤 나라도 그 엔진을 멈추지 못했다. 충분하니까 멈춰야 한다고 말한 나라는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나라들이 증명해 왔다. 경제성장과 행복의 비례관계는 1인당 국민소득 1만5000달러를 전후로 끝난다는 사실을. 부탄은 “이제 그만, 우린 충분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나라라면 왠지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질문 3. 몸이 편하면 행복한가
우리가 치몽에 도착한 다음 날은 부탄력(曆)으로 새해 첫날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사람들이 몰려왔다. 임시로 만든 야외 부엌에는 가마솥이 걸렸다. 설날 음식인 국수 푸타를 만들기 위해 장정들이 커다란 나무틀을 꺼내 왔다. 메밀로 반죽한 후에 나무로 된 기계에 반죽을 넣고 힘으로 누르면 국숫발이 떨어져 내린다. 국수를 먹기 위해 장시간 노동은 기본이다.

열심히 메밀 반죽을 만드는 이 남자, 칼마 왕추크. 올해 나이 스물여섯. 몸을 아끼지 않고 온갖 일에 솔선수범인데 언제나 웃고 있다. 당신을 위해 일할 수 있어서 행복해 죽을 것 같다는 표정이다. 높은 나무 꼭대기를 쳐다보고 있으면 원숭이처럼 올라가 나무 열매를 따 오고, 판자와 천막으로 나를 위한 임시 목욕탕을 만들어 준다. 이 남자는 내가 집이 필요하다고 하면 “예스! 마담”이라고 답하고 바로 주춧돌을 쌓기 시작할 것 같다.

마을 최고의 일꾼에다 일주일 사이에 멧돼지 세 마리와 사슴 한 마리를 활로 잡은 적이 있을 정도로 빼어난 사냥꾼이며, 타고난 가수이자 춤꾼인 데다 착하고 성실하다고 온 동네 사람들이 칭찬하는 이 청년. 키는 나만 한데 몸은 온통 근육이다. 체육관에서 제자리 뛰기로 만든 근육이 아니라 몸을 써서 일하는 동안 자연스레 붙은 근육. 치몽에 머무르는 동안 나는 이 남자에게 거의 반했다. 몸을 쓰는 단순한 노동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니.

치몽에서는 늘 몸을 움직여야만 한다. 집 바깥에 있는 화장실에 가기 위해서도, 공동 수돗가에서 물을 받기 위해서도. 빨래는 당연히 손으로 해야 하고, 키로 쌀을 고르고, 맷돌을 돌려 곡물을 갈아야 한다. 난방이 되지 않아 실내에서도 옷을 두껍게 입어야만 하고,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은 몸을 써야만 얻을 수 있다. 그 불편함이 이상하게도 살아 있다는 느낌을 준다. 분명 내 삶은 일상의 자잘한 노동에서 해방되었지만 그로 인해 더 행복해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해진 몸을 떠안게 된 게 아닐까.

그렇다고는 해도 이 남자와 결혼해 이 마을에서 살겠느냐고 물어온다면? 모르겠다. 걷는 일을 통해 몸을 쓰는 일의 즐거움을 찾는 나이지만, 전기 없이 살거나 매 끼를 해결하기 위해 장작을 땔 자신은 없다. 물을 길어 오거나 키로 돌을 고르는 시간에 다른 일을 하고 싶다. 이런 문화가 남아 있는 건 분명 감사할 일이지만 내가 쉽게 뛰어들 수 있는 삶은 아니다. 선생님은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쉽게 포기할 수 있을지 모른다. 아마도 분명히 그럴 것이다. 비행기 안에서도 개인 컵을 내밀고, 전기를 끄자는 운동을 벌여 일본 전역에 ‘캔들 나이트’ 바람을 불러일으킨 주인공인 데다 육체적으로도 단련된 튼튼한 몸을 가지신 분이니.

일상의 모든 자질구레한 일에 몸을 써야만 하는 이 나라 사람들에게 부탄 정부가 2005년에 노골적으로 물었다. “당신은 행복합니까?”라고. 단지 3.3%의 사람만이 행복하지 않다고 대답했다. 아무래도 몸이 편한 것과 행복은 별 상관이 없는 것 같다.


김남희(38,왼쪽)씨는 주한 터키대사관에서 근무하다가 어느 날 넓은 세상에서 유목민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에 전세 빼고 적금 깨서 여행길에 올랐다. 저서로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여행』시리즈와 『유럽의 걷고 싶은 길』등이 있다. 사진 오른쪽은 쓰지 신이치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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