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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붓다 8대 성지를 찾아서 ⑦ 바라나시의 갠지스강과 첫 설법지 사르나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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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붓다가 첫 설법을 펼친 사르나트의 초전법륜지. 그 자리에 43m 높이의 스투파(탑)가 세워져 있다. 순례객들이 탑 주위를 돌고 있다.

인도를 다녀온 사람들은 말한다. “보드가야와 바라나시의 울림이 가장 크더라.” 붓다가 깨달은 땅 보드가야, 갠지스강이 흐르는 바라나시. 두 곳이 ‘최고의 순례지’라고 입을 모은다. 궁금했다. 삶과 죽음, 순간과 영원, 인간과 신의 경계라는 갠지스강은 어떤 곳일까. 붓다가 첫 설법을 폈다는 사르나트도 바라나시에서 북쪽으로 8㎞쯤 떨어진 작은 마을이다.

◆불타는 하늘, 불타는 강=2월18일 버스는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의 땅 보드가야를 떠나 바라나시로 향했다. 6시간을 달린 끝에 갠지스강에 닿았다. 해질녘이었다. 강가는 사람들로 북적댔다. 힌두교 종교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갠지스강은 ‘신의 강’이다. 하늘에 있던 갠지스강이 시바신(힌두교의 신)의 몸을 타고 땅으로 흘러내렸다고 믿기 때문이다. 현지인 가이드 아진트 신하는 “인도인들은 죽은 뒤 이 강에 뿌려지길 바란다. 갠지스강은 신의 나라로 흐른다고 철석같이 믿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작은 나룻배를 탔다. 노을이 졌다. 붉게 타는 하늘과 붉게 타는 강, 그 사이로 배가 갔다. 붓다는 가야산의 언덕에서 ‘불타는 풍경’을 설한 적이 있다. “모든 것은 불타고 있다. 눈이 불타고 있고, 눈에 보이는 것이 불타고 있다. 욕망으로 불타고, 증오로 불타고, 어리석음으로 불타고 있다. 그러니 집착하지 마라. 집착을 떠날 때 해탈에 이른다.” 유럽의 종교학자들은 이를 ‘붓다의 산상설법’이라고 부른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설한 ‘예수의 산상설교’에 견준 것이다.

그랬다. 갠지스강은 불타고 있었다. 이유는 분명했다. 우리의 눈이 불타는 까닭이다. 내 눈이 불탈 때 세상도 불에 탄다. 내 마음이 불탈 때 이 우주가 불에 탄다. 그래서 붓다는 “불을 끄라”고 했다. 내 안의 불을 끌 때 세상의 불도 꺼진다. 그래서 가짐의 불, 욕망의 불, 집착의 불을 끄라고 했다. 그럴 때 불타지 않는 세상, 그 온전한 깨달음의 세계를 본다고 했다.

인도인들에게 갠지스강은 삶과 죽음, 순간과 영원, 인간과 신의 경계다.

◆갠지스강의 모래알=강 건너편에 닿았다. 배에서 내렸다. 모래밭이었다. 손으로 모래를 한 움큼 쥐었다. 부드러웠다. ‘아, 이게 갠지스강의 모래알이구나.’ 모래는 잘디잘았다. 붓다는 『금강경』에서 ‘갠지스강의 모래알(항하사·恒河沙)’을 언급했다. “갠지스강의 모래알 수만큼 갠지스강이 있다고 하자. 또 그 강들의 모래알 수만큼 삼천대천세계가 있다고 하자. 그 세계를 칠보(七寶)로 가득 채운다면 복덕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런데 ‘금강경’을 받아 지니고, 설하는 공덕이 이보다 더 뛰어나다.”

붓다는 『금강경』에서 줄기차게 말했다. “상(相)이 상(相)이 아닐 때 여래를 보리라.” 무슨 뜻일까. 상이 상이 아닐 때 불이 꺼진다는 얘기다. 경(經)이든, 법이든, 깨달음이든 마찬가지다. 붙드는 순간 상(相)이 생기고, 그 상(相)은 늘 여래를 가린다. 그래서 봐야 한다. 세상의 모든 상이 실은 ‘없는 상’이구나. 그걸 꿰뚫어야 한다. 그곳이 바로 ‘불이 꺼진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 자리의 공덕이 무한한 것이다.

◆물고기와 해탈=갠지스 강가의 사람들이 물에 들어갔다. 강물이 죄를 씻어준다고 믿는 이들이다. 2500년 전에도 그랬다. 브라만교(힌두교의 전신)를 믿던 인도인들은 이 강에 몸을 담갔다. 당시 목욕을 하던 힌두교 바라문에게 한 불교 수행승이 물었다. “왜 몸을 씻나?” “죄를 씻기 위해서다.” 수행승은 말했다. “정말로 갠지스 강물이 죄를 씻어준다면 이 강의 물고기들이 가장 먼저 해탈에 들 것이다.”

영지주의(靈智主義) 기독교 문헌으로 분류되는 『도마복음』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다. “만약 ‘하느님 왕국이 하늘에 있다’고 말하면 새들이 너희보다 먼저 그곳에 이르리라. 만약 ‘하느님 왕국이 바다에 있다’고 말하면 물고기들이 먼저 그곳에 이르리라. 오히려 하느님 왕국은 너희 안에 있고, 너희 바깥에 있다. 너희가 자신을 알게 될 때, 너희가 살아계신 아버지의 아들들이란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고 『도마복음』의 예수는 말했다.

해가 졌다. 캄캄해졌다. 나룻배는 강 건너 화장터에 닿았다. 배에서 내렸다. 바로 1∼2m 앞에서 시신을 화장하고 있었다. 관도 없었다. 나무 장작 위에 천으로 동여맨 시신이 얹혀 있을 뿐이었다. 불이 붙었다. 탔다. 내 것이라 믿었던 몸, 시들지 않으리라 여겼던 육신, 영원하리라 생각했던 ‘나’가 탔다.

순식간이었다. 종이가 타고, 나무가 타듯이 육신이 탔다. 망치로 뒤통수를 ‘쾅!’하고 맞은 듯했다. ‘그렇구나, 정말 그렇구나. 우리의 삶이 순간이구나. 그래서 나중은 없구나. 수행의 길, 구도의 길. 그 길을 갈 때가 지금이구나.’ 갠지스강의 화장터, 거기에 숨 쉬는 붓다의 메시지가 있었다.

◆여기 아라한이 있다=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뒤 보드가야에서 바라나시를 거쳐 사르나트로 갔다고 한다. 무려 320㎞, 서울∼부산간 직선거리다. 그 길을 붓다는 걸어서 갔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들판에서 잠을 자고, 탁발로 끼니를 이으며 갔을 터이다. 이유는 오직 하나, 법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버스는 사르나트로 갔다. 붓다의 최초 설법지는 공원처럼 꾸며져 있었다. 거기에 높이 43m의 웅장한 스투파(붉은 벽돌로 쌓은 탑)가 있다. 붓다는 여기서 다섯 명의 비구에게 첫 설법을 했고 다섯 비구는 아라한(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자)이 됐다. 붓다는 기쁨에 넘쳐서 “여기 여섯 명의 아라한이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자신을 포함해서 말이다. 상대가 멈춘 곳, 상대가 막힌 곳, 정확하게 그곳을 뚫었던 붓다의 혜안이 느껴졌다. 언제쯤일까. “여기 수천, 아니 수만, 아니 수십만의 아라한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은.  

바라나시·사르나트(인도) 글·사진=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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