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사후 10년] 中. 6자회담 디딤돌로 미국에 '다가서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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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사후 10년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외교 행보는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이 분기점이다. 1994년부터 2000년까지 유훈(遺訓)통치 속에서 소극적.방어 외교에 치중했다면,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적극적인 '전방위 외교'로 탈바꿈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김일성 사후 김 위원장에게는 내부체제 정비와 결속, 정권 안정화가 최우선 과제였다"며 "대외관계도 내부 결속을 다지는 차원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때문에 이 기간에는 미사일 시험발사 유예와 금창리 핵문제 논의를 위한 북.미 협상 등 안보 관련 대외 접촉만 있었을 뿐 개혁.개방과 관련된 외교 행보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김 위원장의 이 같은 행보는 2000년 이후 급변했다. 내부 체제정비에 성공했다는 판단이 서자 차츰 외부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6.15 남북 공동성명 발표 뒤 남북관계에 획기적 물꼬를 튼 김 위원장은 2001년을 신(新)사고의 원년으로 삼고 본격 외교 행보에 나설 태세를 갖췄다.

하지만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이 행보엔 급제동이 걸렸다. 부시 대통령은 2002년 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며 압박의 강도를 높여갔다. 북한은 2002년 7월 '7.1경제관리개선조치'를 내놓으며 개혁.개방의지를 내비쳤으나 그해 10월 제2차 북핵 위기가 터지면서 또다시 난관에 봉착했다.

북한은 이후 지금까지 핵을 거의 유일한 지렛대로 미국을 비롯한 주변 강국들과 '벼랑끝 외교'를 거듭하고 있다. 한차례의 북.미.중 3자회담과 세차례의 6자회담(남.북한,미,중,일,러)을 거치면서 북핵 문제는 북한 외교의 최대 현안이 됐다. 그 와중에 김 위원장은 중국을 세차례, 러시아를 두차례 방문하는 한편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일본 총리를 두번 북한으로 초청하며 활발한 정상외교를 펼쳤다.

한 정부 당국자는 "북한이 핵개발을 계속하는 한편 정상외교로 대외환경도 개선해 나가는 등 두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지난주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외교장관 회의에 와병 중인 백남순 외무상이 주치의를 동반한 채 전용기를 타고 참석하는 정성을 보인 것도 이 같은 맥락이란 해석이다. 하지만 북한이 ▶남북관계 개선▶일본과의 국교정상화 시도▶중국.러시아와의 혈맹관계 복원 등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바탕에는 결국 미국과의 관계개선 의지가 깔려 있다는 게 주변국들의 공통적 인식이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의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박신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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