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전통은 권위가 만든 허울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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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잘못된 믿음을 교정하는 것은 역사학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다. 역사학이 인문학의 중심에 자리잡은 까닭이기도 하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완역된 '만들어진 전통'(박지향.장문석 옮김, 휴머니스트)은 이런 범주의 전형에 해당하는 저술이다.

책의 편저자는 '혁명의 시대''자본의 시대''제국의 시대''극단의 시대'등 역사 4부작으로 국내 지식층에 널리 알려진 영국의 대표적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 '혁명의 시대' 이후 학문적으로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저술로 평가받는다.

이런 평가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이던 '오랜 전통'들이 사실은 근대 이후 국가의식이나 민족주의를 고취하기 위해 만든 허상임을 밝혀냈기 때문이다. 역사학 전문 저널 '과거와 현재'에 제출된 논문을 기초로 여러 역사학자들이 참여해 만들어 낸 이 책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은 것은 역시 영국의 전통. 거창한 왕실 의례 대부분이 1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전통임을 밝힌다. 엘리자베스 2세가 고색창연한 마차를 타고 의회 개원을 위해 웨스트민스터로 향하는 모습이 대표적이다.

이 책은 국경일이나 영웅.상징물들이 유럽에서 대량으로 만들어진 것이 20세기 초라는 데 주목한다. 영국이 18세기 후반 세계 최초로 국가 '신이여 국왕을 보호하소서(God save the King)'를 만든 이후 프랑스에서 삼색기가 제작되고 '라 마르세예즈'가 국가로 지정됐다는 것이다. 영국에서의 '전통의 창조'는 인도인과 아프리카인들에게 권위를 과시하려는 전략과 이어진다는 점도 지적한다.

책의 궁극적 목적은 현재의 필요에 의해 역사와 전통이 재구성되는 것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왜 기억되는가'를 규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들어진 전통'이 상이한 이해관계를 가진 개인과 집단들에게 동질성을 부여하는 과정을 추적한다. 저자들은 결국 이같은 '전통의 창조'가 근대 민족국가의 권위와 정체성을 마련하기 위한 전략임을 밝힌다. 민주주의의 등장으로 대중정치가 출현함으로써 시민들의 복종과 충성을 확보하기 위한 '공식 기억'이 필요했고, 이것이 의례나 상징 등 '전통 만들기'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홉스 봄의 장점은 쉽게 읽히는 역사책을 쓴다는 것이다. 이 책도 영국 역사에 대한 보통의 상식만 갖췄다면 흥미롭게 읽어나가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 번역자 중 한 명인 박지향(서울대.서양사) 교수는 "이 책은 출간 당시 영국사는 물론 인류학.사회학 등 관련 학문에 큰 영향을 미쳤다"며 "역사를 다시 보는 눈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역사의 비판적.인문학적 기능을 가장 충실하게 보여주는 책"이라고 평가했다.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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