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북 작가 김사량 희곡 ‘호접’ 60년 만에 빛 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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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제국주의 일본에서 일본어로 작품을 써야 했던 분열된 내면의 조선인. 해방된 남·북한 어디로부터도 전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던 비운의 주인공. 월북 작가 김사량(1914∼50년 사망 추정)이 조선인의 항일 투쟁을 소재로 쓴 장막 희곡 ‘호접(胡蝶·나비)’이 60여 년 만에 발굴됐다. 그동안 ‘호접’은 1945년 말 해방공간 서울에서 공연된 기록만 전해질 뿐 남북한 작품집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었다.

한·중문학포럼은 한국의 3·1 운동, 중국의 5·4 운동 90주년을 맞아 항일 투쟁 서사를 테마로 열렸다. 양국 문학 연구자는 물론 대만·일본 학자들이 25~26일 중국 자싱에 모였다. 왼쪽에서 셋째가 박재우 한국외국어대 교수, 넷째는 김춘선 중국 중앙민족대학 교수.


‘호접’은 김재용 원광대 국문과 교수가 2002년 발견했다. 해방 직후 문학사 정리 작업을 하던 김 교수는 러시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호접’이 실린 북한의 해방 1주년 기념 희곡집(46년 출간)을 찾아냈다. 작품의 진위 여부, 문학적 가치 판단 등 준비 작업을 거쳐 25~26일 중국 상하이 남쪽 중소도시 자싱(嘉興)에서 열린 ‘한·중 문학포럼’에서 결과를 발표했다. 포럼은 3·1 운동과 중국의 5·4 운동 90주년을 기념해 한·중 문학작품에 나타난 조선인들의 항일 투쟁 서사를 살펴보자는 취지로 마련됐다.

◆항일투쟁 의용단원 위로한 ‘호접’=‘호접’은 41년 12월 중국 허베이(河北)성 스자좡(石家莊) 부근에서 조선의용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벌인 ‘호가장 전투’를 다룬 3막4장 희곡이다. 시인 독립전사와 그를 사랑하는 여성 독립군, 생존을 위해 중국 땅으로 흘러들어 아편장수로 전락했다가 일본군의 사주를 받아 의용군에 잠입했으나 전향한 독립군과 그의 아내 등 다채로운 인물군이 등장한다.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지만 수십 명을 사살하고 독립군은 네 명만 숨지는 대승을 거둔다는 내용이다. 마지막은 아편장수의 아내가 정신적 충격을 받아 자살하는 것으로 끝을 맺지만 일본 제국주의를 물리치려면 한국과 중국이 힘을 합해야 한다는 주장이 도처에 등장한다.

김 교수는 “항일 투쟁을 고취하는 내용의 ‘민족 서사’가 바탕이지만 자칫 파시즘·국가주의로 흐를 수 있는 좁은 민족주의에 갇히지 않고 이웃 나라 중국과의 반식민주의 연대 투쟁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재조명 받아 마땅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김사량은 동경제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40년 ‘빛속으로’라는 작품으로 일본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오른 엘리트 문인이다. 일제에 의해 학도병 위문단으로 동원돼 중국에 파견되자 45년 탈출, 조선의용단에 가담했다가 해방을 맞는다. ‘호접’은 전쟁터의 의용단원 위로 공연을 위해 씌여진 것으로 보인다. 김 교수는 “80년대 말 해금되긴 했지만 남한에서는 월북 문인이라는 이유로, 북한에서는 좌·우 합작을 지향했던 조선의용군을 배척하는 분위기 속에 작품이 사라졌던 것 같다”고 말했다.

◆독립투사들의 은신처 자싱=한·중문학포럼이 열린 자싱은 우리 독립투사들이 몸을 피했던 곳으로 이름난 곳이다. 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조선인 체포령이 내려지자 김구 선생이 36년까지 수시로 피신했던 은신처가 이곳에 있다. 포럼을 공동주최한 한중문학비교연구회·중국중앙민족대학과 지역 신문인 ‘자싱일보사’ 등은 그런 각별한 인연을 고려해 포럼을 자싱에서 열었다.

포럼을 기획한 박재우 한국외국어대 중국학부 교수는 “포럼을 통해 한·중간 이해의 폭을 넓히려는 목적도 있지만 한국 문학 작품의 중국 내 인지도를 높이는 이득도 있다”고 말했다. 중국의 영향력 있는 평론가·문학 연구자들의 한국 문학 이해도를 높여야 일반 중국인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데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박 교수는 “이를 위해 양이(楊義) 중국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장, 황젠(黃健) 저장대 교수 등 비중 있는 중국 학자들을 초청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는 성민엽 서울대 중문과 교수, 이등연 전남대 중문과 교수, 홍석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등이 참석했다. 홍 교수는 조선의 독립에 냉담했던 중국 작가 노신의 면모를 발표했다. 포럼은 대산문화재단이 후원했다.

자싱(중국 저장성)=글·사진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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