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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뉴스 인 뉴스 <14> 체르노빌 원전 폭발 그 후 23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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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최대의 참사 가운데 하나인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4월 26일)가 일어난 지 23년이 지났다. 방출된 방사능물질이 수만~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원전 인근의 생태계를 송두리째 파괴한 무시무시한 참사였다. 지금도 수많은 피폭자가 암·백혈병 등으로 고통받고 있다. 원전 반경 30㎞ 이내 지역은 여전히 사람이 살 수 없는 통제구역으로 묶여 있다. 하지만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체르노빌이 가져다준 핵공포는 인류의 기억에서 서서히 잊혀 가고 있다. 그 사이 원자력은 다시 화석연료를 대체할 수 있는 청정에너지로 주목받고 있다. 체르노빌 참사와 원전 산업의 현주소를 살펴본다.

유철종 기자

원전 반경 30㎞는 여전히 통제구역… 피해 규모는 아직도 논란 중

미국 동부까지 방사능 낙진

1986년 4월 26일 오전 1시23분45초(현지시간). 당시 소련에 속했던 우크라이나 동북부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4호기에서 두 번의 거대한 폭발음이 울렸다. 원전 직원이 전력통제 시스템을 시험하던 중 원자로가 폭발한 것이다. 원자로가 위치한 콘크리트 건물의 지붕이 날아가고 시커먼 핵구름이 하늘로 치솟았다. 건물은 순식간에 세찬 불길에 휩싸였고 원자로와 그 안에 있던 핵물질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역사상 최악의 원전 사고인 체르노빌 참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사고 후 며칠이 지나도록 화재가 잡히지 않으면서 우라늄·플루토늄·세슘·스트론튬 등 치명적 방사능 물질 10t 이상이 대기로 방출됐다. 45년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의 핵오염 수준보다 400배나 높았다. 방사능 낙진은 바람을 타고 이웃 벨라루스와 러시아는 물론 동유럽과 스칸디나비아 반도, 심지어 미국 동부에까지 날아갔다.

37만 명 안전지역으로 이주

원자로 폭발 후 소방대원들이 불길을 잡으려고 10시간 동안 사투를 벌였지만 허사였다. 이어 30대 이상의 군용 헬기가 납과 모래·탄화붕소 등을 뿌렸지만 역시 소용없었다. 화재는 5월 6일까지 계속됐다. 화재 진압 후 소련 정부는 우크라이나·벨라루스·러시아 등에서 소방관과 군인·경찰·원전 기술자 등을 긴급 차출해 사고처리반을 구성한 뒤 현장으로 급파했다. 86~87년에 24만 명이 동원됐다. 90년까지 계속된 사고 수습 동원 인원은 60만 명에 달했다. 사고 7개월 뒤 원자로 4호기 잔해와 오염물질을 콘크리트로 덮어씌우는 작업이 완료되면서 방사능 유출은 일단 차단됐다. 원전 반경 30㎞ 이내 지역은 통제구역으로 선포돼 모든 주민이 소개됐다. 약 37만 명의 주민이 거주지를 떠나 안전지역으로 이주했다.

소련 정부의 늑장 대응은 인명 피해를 키우는 원인이 됐다. 처음에는 사고에 대해 침묵하던 소련 정부가 참사 이틀 뒤인 28일에야 TV 방송을 통해 사고 사실을 공표했다. 자국에서 허용치 이상의 방사능을 감지한 스웨덴 정부가 해명을 요구하자 뒤늦게 밝힌 것이다. 원전 인근 주민을 처음으로 소개시킨 것도 사고 발생 36시간 뒤였다.

주변 거대한 숲 붉게 말라죽어

정확한 인명 피해 규모는 지금도 논란거리다. 2005년 국제원자력기구(IAEA) 등 유엔 기구와 주요 3개 피해국(우크라이나·벨라루스·러시아) 정부가 주도하는 ‘체르노빌 포럼’의 보고서는 사고로 인한 직접적 사망자 수가 56명이며, 앞으로 4000명이 방사능 피폭에 따른 암으로 사망하게 될 것으로 추산했다.

하지만 민간단체들은 피해 규모가 지나치게 축소됐다고 반박했다. 국제환경단체 그린피스는 2006년 자체 보고서에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러시아 등 3개국에서만 20만 명이 사망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앞으로 9만3000명의 피폭자가 암으로 사망하게 될 것이라고 추산했다. 세계 62개 의료단체 모임인 ‘핵전쟁 방지를 위한 의사회’는 사고 처리요원 54만 명이 불구자가 됐으며, 이 중 최소 5만 명이 사망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피폭자들에게서 발견되는 유전적 결함은 미래 세대까지 전달될 수 있다고 의사회는 경고했다.

생태계 파괴도 심각했다. 원전 인근의 거대한 숲이 붉게 말라죽었다. 야생동물도 죽거나 생식력 상실, 발육 중단 등의 이상 증세를 보였다. 일부 학자는 지금도 오염 지역 내의 벌·메뚜기·잠자리 등의 개체수가 줄어들고 있다고 주장한다.

균열 생긴 콘크리트 위에 추가 구조물 계획

체르노빌 원전은 사고 6개월 뒤 재가동에 들어갔다. 당시 우크라이나 공화국 정부가 에너지 부족을 이유로 남은 3개 원자로를 다시 가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91년 2호기에서 또다시 화재가 발생해 그해 10월 가동이 중단됐고, 1호기와 3호기도 96년과 2000년 각각 가동을 멈추면서 원전은 완전 폐기됐다. 최근 사고 원자로 4호기를 덮고 있는 콘크리트 구조물에 균열이 생기면서 방사능 추가 유출 위험이 커지고 있다. 콘크리트와 철근이 흘러든 빗물에 부식돼 구조물이 붕괴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미국·유럽연합(EU)·우크라이나 등이 97년 공동으로 설립한 ‘체르노빌 피난처기금’은 100년을 견딜 수 있는 새로운 철제 차단 구조물을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원전 주변은 여전히 폐허로 남아 있다.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이곳의 방사능 수준은 지금도 정상치를 넘어선다.



그래도 원자력

“체르노빌 원자로와 다른 방식 채택”
CO₂ 줄이려 세계 각국 원전 건설

원자력 발전소 덕분에 폐광 도시에서 부자 도시로 변신한 프랑스의 플라망빌. 도버해협에 인접한 플라망빌은 원전을 유치해 일자리와 세수를 늘렸다. [www.world-nuclear-news.org]

2000년 12월 15일 레오니트 쿠치마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미국 에너지장관과 러시아 총리 등 세계 각국 저명인사 200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지막 남은 체르노빌 원전 3호기의 가동 중단 버튼을 눌렀다. 역사상 최악의 원전 참사 주역에 ‘사형’이 집행되는 순간이었다. 쿠치마 대통령은 “모든 인류를 위해 체르노빌은 반복돼서는 안 될 비극의 상징으로 남을 것이며, 오늘 우리는 가장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체르노빌 참사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 침체에 빠졌던 원전 산업은 다시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 지구온난화 방지를 위한 온실가스 감축이 국제사회의 중심과제가 되면서 화력발전소를 원전으로 대체해 이산화탄소(CO₂) 배출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유가 상승도 이 같은 흐름을 부채질하고 있다. 풍력·태양력 같은 친환경에너지 보급이 늘고 있지만 아직 화석연료를 대체하기엔 역부족이다. 원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이유다.

1979년 펜실베이니아주 TMI 원전 사고 이후 30년 동안 원전 건설을 전면 중단했던 미국이 31기의 새 원전을 건설하겠다고 나섰다. 심각한 전력난과 청정에너지에 대한 수요 때문이다. 전력 부족에 시달리는 중국도 2020년까지 40기의 원전을 건설할 계획이다. 체르노빌 사고 이후 국민투표를 통해 가동 중이던 원전을 모두 폐쇄했던 이탈리아도 2020년까지 4기 이상을 짓기로 했다. 2010년까지 원전 중지 결정을 내렸던 스웨덴 정부도 신규 원전 건설을 허용하는 법안을 채택했다. 현재 20기를 보유한 세계 6위의 원전 강국 한국도 2022년까지 12기를 추가 건설해 원자력 발전의 비중을 48%까지 확대할 방침이다.

국내 원자력발전소는 원자로의 형태가 체르노빌과 다르다. 핵반응 제어 방식과 냉각 방식이 달라 체르노빌과 같은 종류의 사고는 일어날 수 없다. 백원필(48) 한국원자력연구원 열수력안전연구부장은 “현재 세계적으로 430여 기의 원전이 운전 중이지만 체르노빌 이후 20여 년 동안 일반 대중의 안전에 위협을 줄 수 있는 사고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며 “국내 원자로에서 만의 하나 사고가 난다 해도 체르노빌처럼 대량으로 방사능이 유출될 가능성은 없다”고 말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

■ 발생

·1986년 4월 26일 오전 1시23분45초(현지시간)

·소련 우크라이나 공화국 체르노빌 북서쪽 18㎞ 프리피야트

·4개 원자로 중 제4호기 전력통제 시스템 점검 도중 폭발

■ 원인

·사고 직후엔 원전 직원의 조작 실수로 잠정 결론

·이후 원자로의 설계 결함이 주요 원인이란 주장 제기

■ 참사

·1945년 일본 히로시마 원폭 때보다 400배 많은 방사능 유출

·우크라이나·벨라루스·러시아는 물론 동유럽과 스칸디나비아반도, 미국 동부까지 방사능 낙진 확산

■ 사후 처리

·86~87년 24만 명의 사고처리 요원 투입

·90년까지 총 60만 명 동원

·원전 반경 30㎞ 이내 주민 37만 명 이주시킨 뒤 ‘통제구역’으로 지정

·사고 원자로 콘크리트로 밀봉

■ 인명 피해

·국제원자력기구(IAEA) 주도 ‘체르노빌 포럼’: 직접 피폭 사망자 56명, 최고 4000명 암으로 사망 예상

·그린피스: 20만 명 사망 추정, 9만3000명 암으로 사망 예상

·핵전쟁 방지를 위한 의사회: 54만 명 불구자, 최소 5만 명 사망 예상

■ 현재 상황

·사고 6개월 뒤 3개 원자로 재가동했다가 91~2000년 완전 폐쇄

·현재 사고 원자로 4호기 덮고 있는 콘크리트 구조물 위에 철제 차단 구조물을 세우기 위한 사업 추진 중

·원전 반경 30㎞ 지역은 여전히 통제구역.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방사능 수준 여전히 정상치보다 높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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