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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 취임 100일 … 외교의 패러다임 바뀌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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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1933년 대공황의 혼란 속에 32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임기 시작과 동시에 각종 개혁조치를 전쟁하듯 속전속결로 해치웠다. 그리고 당당하게 취임 100일을 맞았다. 이후 취임 100일은 미 대통령들에게 새 구두에 달라붙은 껌처럼 찜찜하고 부담스러운 기념일이 됐다. 다들 첫 100일 안에 가시적 성과를 내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렸다. 29일 취임 100일을 맞는 미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오바마는 이날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타운홀 미팅을 가질 예정이다. 오후 8시, 황금시간대엔 백악관 기자회견이 예정돼 있다. 그동안 치러온 ‘경제와의 전쟁’ 성과를 설명하며 국민에게 희망과 자신감을 불어넣으려 할 것이다. ‘제2의 루스벨트’를 노릴 수도 있다. 첫 중간고사 성적표는 일단 나쁘지 않다.

USA투데이와 갤럽이 지난주 미 성인 남녀 1051명에게 오바마가 잘하고 있는지 수우미양가 5단계로 평가해 보라고 했더니 ‘미(just OK)’ 이상이 79%였다. 국민의 절대 다수가 그만하면 나쁘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퓨 리서치 센터가 며칠 전 실시한 조사에서 오바마의 국정수행 지지도는 63%였다. 취임 당시의 80%에는 못 미치지만 시간과 함께 퇴색하는 ‘밀월효과’를 감안하면 크게 떨어진 것은 아니다.

AP통신 조사 결과는 오바마에게 더욱 고무적이다. ‘미국이 올바른 길로 가고 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48%)는 응답이 ‘아니다’(44%)는 응답을 5년여 만에 처음으로 앞질렀다. 전임 대통령의 임기 말인 지난해 10월 조사 때는 ‘아니다’(75%)가 ‘그렇다’(17%)보다 네 배 이상 많았다. 첫 단추는 일단 성공적으로 꿴 셈이다.

그렇다고 오바마가 ‘제2의 루스벨트’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속단하긴 이르다. 업적을 말하기에 100일은 너무 짧다. 특히 최대 관건인 ‘경제와의 전쟁’은 결과로 말할 수밖에 없다.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며 오바마는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감을 내비쳤지만 여전히 경제는 캄캄한 터널 속에 있다.

이에 비해 확실히 점수를 딴 것은 외교다. 미 외교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지난 100일간 오바마는 외교 노선의 급격한 전환을 선보였다. ‘악의 축’이었던 이란에 손을 내밀고, 50년 적성국인 쿠바와도 적극적인 화해를 모색하고 있다. 이미 150만 쿠바계 미국인에 대해 여행과 송금 제한을 철폐했다. 우라늄 농축을 중단하기 전에는 이란과 대화할 수 없다던 조지 W 부시의 정책에서 180도 선회해 일정 수준의 우라늄 농축을 허용하는 선에서 직접 대화를 제안했다.

미국의 뒷마당인 중남미를 ‘반미(反美)기지’로 바꾸는 선봉장 역할을 해온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과 오바마가 다정하게 악수하는 장면은 미 외교의 극적인 변화를 상징하는 ‘이 한 장의 사진’이 됐다. 군사력에 기반한 일방주의 외교를 버리고,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를 결합한 ‘스마트 외교’로 다자적 현실주의 노선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오바마는 이달 초 런던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부시와 오바마 외교의 차이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남의 말에 귀 기울이고, 모범을 보이고, 겸손함을 보일 때 리더십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대답했다. 오바마 외교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겸손과 모범이다. 낮은 자세로 남의 말을 경청하고, 필요할 때 모범을 보임으로써 미국의 진정한 리더십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괴 직전의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연상시키는 순진하고 나약한 ‘저자세 외교’로는 위험한 세상에서 미국의 국익을 지킬 수 없다는 반론도 있지만 오바마 외교는 국내외에서 폭넓은 지지를 얻고 있다. 갤럽 여론조사에서 미국인들은 첫 100일 동안 오바마가 가장 잘한 것으로 ‘전 세계에 미국의 이미지를 고양한 점’을 꼽았다.

물론 손에 잡히는 결실은 아직 없다. 이란은 간첩 혐의로 억류된 미국 여기자에게 8년의 실형을 선고했고, 유럽은 여전히 아프가니스탄 추가 파병 요청에 냉담하다. 더구나 북한은 장거리 로켓을 발사하고, 핵 재처리 시설 재가동에 들어가는 등 대화와 화해의 조류와 정반대로 가고 있다. 일단 북한에 대해서는 예외적으로 전략적 무시정책으로 오바마는 대응하고 있지만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시점이 조만간 올 것이다. 그것은 2차 핵실험이 될 수도 있고, 플루토늄 재추출이 될 수도 있다.

그때가 되면 성숙한 어른이 울며 보채는 버릇없는 아이를 다루는 방식을 놓고 한바탕 격론이 벌어지면서 오바마 외교가 진퇴양난에 빠지는 사태가 올 수도 있다. 타일러서 안 되는 아이는 따끔하게 혼내 줘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스마트 외교에 대한 강경파의 맹공이 절정을 이룰 것이다. 자칫 북한 ‘막가파’와 미국 ‘매파’ 사이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샌드위치 신세가 될 수도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대국(大國) 행보’를 본격화하고 있는 중국도 변수다. 중국 견제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북한의 우선순위를 앞당기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지난 100일 동안 오바마 외교는 씨를 뿌렸을 뿐이다. 그것이 어떤 결실을 거둘지는 두고 봐야 한다. 혼자 노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요란한 박수 소리도 성공을 보장하진 않는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