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해낸다]7.勞使不二 대타협 손잡자…IMF시대 적대 고집땐 공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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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안산 시화공단의 자동화기기 생산업체인 극동이엔지 근로자 30여명은 최근 회사에 자진 반납한 상여금 2백%를 전액 우리 사주 (社株) 로 되돌려 받았다.

어려운 회사 사정을 모른 체할 수 없다는 '노사불이 (勞使不二)' 의 근로자 정성에 사장은 '회사는 개인 소유물이 아닌 근로자의 생활터전' 이라고 화답한 것이다.

예년의 임금협상 시기보다 3개월여 이른 지난 5일 현재 올해 임금동결 및 노사간 무교섭 타결을 선언한 사업장이 2백곳을 넘어서고 있다.

우리에게 몰아닥친 국제통화기금 (IMF) 한파는 전근대적.적대적 노사관계를 청산하고 신 (新) 노사시대를 열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한국노동연구원 선한승 (宣翰承) 박사는 "IMF사태를 계기로 우리의 노사관계는 선진화냐, 파국이냐의 기로에 서 있으며 그 결과는 우리나라가 재도약하느냐, 나락으로 떨어지느냐로 연결될 것" 이라고 강조했다.

건강한 노사관계 확립이 위기극복의 열쇠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그동안 우리 노사관계는 대립의 연속이었다.

노사는 한 배를 탄 동지가 아니라 타도의 대상이었다.

기업이 덩치 키우기에 골몰하는 동안 노조는 임금인상의 목소리만 높였다.

그 결과 지난 10년간 우리나라의 임금은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국가의 임금상승률보다 5~40배 높은 급상승을 거듭했다.

기업의 잘못으로 국제경쟁력 또한 급속히 떨어졌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노사관계의 기본 틀이 임금에서 고용으로 바뀌고 있다.

그럼에도 벼랑 끝에 매달린 상황에서 난국 타개를 위한 노사정 (勞使政) 합의마저 서로 먼저 고통을 감수할 것을 요구하는 노사간의 줄다리기로 늦춰지고 있다.

경영계는 "글로벌 무한경쟁 속에서 기업의 고용 유연성 확보는 필수적이며 이러한 고통을 바탕으로 경쟁력을 확보함으로써 향후의 호황과 고용확대를 꾀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때" 라고 주장한다.

(한국경총 金榮培정책본부장) 그러나 노동계는 "현 위기의 책임이 족벌.재벌경제 체제, 정경유착, 관치금융, 과다한 차입경영 등에 있음을 도외시한채 위기극복의 부담을 근로자에게만 지우려한다" 고 반발한다.

(한국노총 李南淳사무총장) 이같은 대립은 경총.노총 등 전국단위 노사단체가 구체적 자료에 기초한 정책대결을 하지 못하고 있는 데 기인한다.

서로의 요구조건만 부풀려 할인흥정식 협상에 익숙할 뿐이다.

독일 노총이 산하 경제사회연구원의 전문가 집단이 분석한 각종 경제지표를 바탕으로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은 시사하는 바 크다.

미국 등 선진국의 노조조직률 (피고용자중 노조원 비율) 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 것은 대결보다 공생관계로 가고 있다는 해석을 낳게 한다.

노사간에 발상 전환을 해야 할 부분들은 이제 명확하다.

경영계는 먼저 재무제표 등 경영상태를 투명하게 공개해 근로자들의 이해를 구해야 한다.

노조가 지금까지의 성장을 함께 일궈온 동반자임을 인정하고 정리해고가 경영혁신 등을 통한 자구노력 뒤의 최후의 수단임을 약속해야 한다.

마구잡이로 잘라내 근로자들의 신뢰를 잃는다면 궁극적으로 그 회사는 경쟁력을 잃고마는 결과를 얻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유력 금융회사였던 피바디가 유능한 주식중개인들이 경쟁업체로 옮겨가 사세가 급격히 쇠락한 것은 회사.근로자간의 불신이 경쟁력 상실로 이어진 좋은 예다.

노조도 실리만을 따진 무리한 요구에 앞서 국민경제를 우선 생각하는 사회적 합의주의를 바탕으로 한층 성숙해져야 한다.

경제 회생을 위해 불가피하다면 더 늦기 전에 제 살을 잘라내는 감원.감봉도 받아들여야 한다.

올해 예상되는 대량 실업사태 속에 정리해고보다 기업 도산에 따른 실업이 더욱 많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올해 성장률이 3%에 못미칠 경우 추가 발생할 실업자 60만명 가운데 기업의 폐업.도산으로 인한 실업자가 40만명에 이를 것이라는 게 정부 및 민간연구소의 예상이다.

미국이 24년만의 최저 실업률 (4.6%) , 32년만의 최저 물가상승률 (0.1%) 이라는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게 된데는 80년대말의 대량 감원과 임금인상 자제 등 근로자 희생의 기여가 있었다고 한다.

미 MIT대 폴 크루그먼 교수도 "지난 10년간 미 근로자들의 실질임금이 동결됐다는 사실이 미국이 경쟁력을 회복한 유일한 이유" 라고 단언할 정도다.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다.

대타협 아니면 공멸이다.

국제적 개방화시대에 노사는 양대 수레바퀴가 돼 회사의 국제경쟁력을 키워나가는 데 노사관계의 초점을 두어야 한다.

이훈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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