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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살아있는 전설, 87세 검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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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키니는 연방정부사상 최고령 검사다. 나이는 87세. 1951년 3월 법무부에 들어가 58년째 활동하고 있다. 그 사이 대통령 12명과 법무장관 27명이 바뀌었다. 그의 직책은 범죄담당 부차관보. 40여 년 전의 지위 그대로다. 강산이 몇 번 변할 정도로 많은 세월이 흘러 할아버지가 됐어도, 정권이 여러 차례 바뀌었어도 그가 말뚝 박은 듯 같은 자리에 남아있는 건 조직범죄 수사의 최고 권위자이기 때문이란다. 그는 라스베이거스 등에서 마피아의 범죄활동을 색출했고, 아시아·러시아계 범죄조직도 대거 소탕했다.

그 공을 기려 연방정부는 2000년 범죄국 건물에 키니의 이름을 붙였다. 당시 법무부 부장관이던 에릭 홀더 현 법무장관은 헌정식에서 “키니는 가장 존경받는 검사”라며 “그가 남긴 족적은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자의 전화를 받은 법무부 관계자는 그를 ‘살아있는 전설(a living legend)’이라 불렀다. “그가 언제 은퇴할 것인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가 건강을 잃지 않는 한 우린 전설을 계속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 관계자가 보내준 자료에 따르면 철도 노동자의 아들 키니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대학을 휴학하고 공군에 입대했다. B-17 폭격기 항법사가 된 그는 영국의 기지에 배치됐다. 그리고 독일군을 공습하는 임무를 수행하다 폭격기가 대공포에 맞는 바람에 포로가 됐다. 1945년 종전과 함께 풀려난 그는 스크랜튼 대학과 디킨슨 대학 법률대학원을 마치고 법무부 검사가 됐다.

키니는 1996년 법률전문지 ‘바 리포트(Bar Report)’와의 인터뷰에서 ‘그간 10명의 대통령 밑에서 일했다. 대통령이 바뀌면 (고위 공직자인) 당신도 영향을 받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했다. “법무부에서 정치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범죄는 범죄일 뿐이므로 우린 수사만 잘하면 된다. 대통령이 수사에 관여하면 곤경에 빠진다. 언론이 금세 알아차릴 테니까.”

‘대형 법률회사와의 봉급 차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엔 “법무부 검사의 위대한 점은 옳은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건 어떤 대가로도 얻을 수 없는 보상이다”고 답했다.

한국의 눈으로 보면 키니는 ‘천연기념물’ 감이다. 나이가 들든 말든, 후배가 앞서 가든 말든 40여 년간 한 자리에서 일한 검사가 한국엔 없기도 하지만 누가 권력을 잡든 정치바람을 타지 않고 검사의 본분을 지킨다는 게 한국에선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적 풍토에서 87세의 나이에 검사로 활동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한국판 키니’는 탄생하기 어렵다. 그러나 정신과 자세는 얼마든지 배울 수 있다. 우리 검찰이 그를 본받는다면 ‘정치 검찰’이란 지탄의 소리는 잦아들지도 모른다.

이상일 워싱턴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