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생계형 범죄’라니 … 서민들 복장 터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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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난 22일 홈페이지 폐쇄를 알리는 글에서 보인 사죄의 심정엔 공감이 갈 만했다. 노 전 대통령은 정상문 전 총무비서관이 공금횡령으로 구속된 마당에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며 ‘이제 제가 할 일은 국민에게 고개 숙여 사죄하는 일입니다’라고 밝혔다. 그런데 이후 노 전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조기숙 전 홍보수석비서관(이화여대 교수)과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의 발언을 들어보면 전혀 분위기가 다르다.

조 교수는 23일 한 인터뷰에서 노 전 대통령을 ‘생계형 범죄에 연루된 사람’이라고 옹호했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 권력을 동원해 저지른 ‘조직적 범죄’와 비교하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공금횡령에 대해서는 ‘노 전 대통령이 얼마나 재산이 없고 청렴했으면 참모가 안타까운 마음에 그런 일을 했겠느냐’라고 말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검찰 수사는 ‘명백한 정치보복으로 전임 대통령과 그를 지지했던 국민에 대한 모욕이자 도전’이라는 것이다. 유 전 장관도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검찰 수사는 이명박 정권의 전임 대통령 모욕 주기 공작’이라고 주장했다.

집단 도덕불감증이 아닐 수 없다. 생계형이니 보복이니 하는 말로 감싸기엔 드러난 범죄가 너무 뚜렷하다. 노 전 대통령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약 70억원의 돈을 받은 의혹을 받고 있다. 2007년 6월 가방에 넣어 청와대로 직접 전달된 100만 달러, 부인 권양숙 여사가 받았다고 주장하는 3억원, 2008년 2월 조카사위 연철호씨를 거쳐 아들 건호씨에게 건네진 것으로 알려진 500만 달러, 박 회장이 회갑 선물로 주었다는 1억원짜리 시계 2개까지. 이게 무슨 생계용인가. 이런 사람을 어떻게 청렴하다 부르는가.

노 전 대통령 측의 행태는 더 옹색하다. 돈을 받은 정황도 부끄럽지만 이후 대응도 시종 발뺌과 핑계다. 노 전 대통령이 잘 모른다고 했던 100만 달러에 대해 박 회장은 ‘노 전 대통령이 직접 달라고 해 줬다’고 말했다. 권양숙 여사가 받아 ‘빚 갚는 데 썼다’던 돈은 정 전 비서관의 차명계좌에 그대로 보관돼 있다. 정 전 비서관은 공금인 청와대 특수활동비 12억원을 수차례에 걸쳐 빼돌려 세탁, 비자금으로 조성했다. 정 전 비서관은 대통령을 위해 모았다고 하고, 대통령은 몰랐다고 한다. 500만 달러에 대해서도 대통령은 조카사위에게 준 투자금이기에 별문제가 없다지만 검찰 조사 결과 아들 건호씨에게 준 돈이라는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대통령의 권력형 비리를 생계형이라고 주장한다면, 진짜 생계를 위협받는 서민들은 복장이 터진다. 그토록 도덕과 청렴을 주장하던 사람들이 이제 와 ‘전두환·노태우보다 액수가 적다’는 군색한 핑계로 동정을 사려는 것인가. 액수는 적을지 몰라도 깨끗한 척하며 뒤론 검은돈을 챙긴 위선적 행태에 더 큰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노 전 대통령 쪽 사람들은 그들이 경멸했던 특권의식에 푹 빠져 스스로 죄의식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모습을 확인해야 하는 국민들도 안타깝고 창피하다. 더 이상 실망스러운 모습 보이지 말고 사법 절차에 적극 협력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