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화를 복으로 만들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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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이제 여덟 살 난 아이에게 혼자서 집 보는 연습을 시켜야 할까 봐요. 남편 월급만 쳐다보고 있자니 불안하고요. 저도 뭔가 나서서 돈을 벌어야 하지 않겠어요. " 최근 만난 한 주부가 "그새 화장지값도 배나 올랐다" 며 한숨 끝에 내뱉던 말이다.

평소 왕처럼 떠받들며 키우던 아이에게 집을 맡길 생각이 들 정도로 가계의 주름살이 심각하다.

하지만 이런 경제 위기가 우리의 해묵은 악습을 청산할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도 될 수 있다.

생활에서 거품을 거둬내고 절약과 내핍으로 살림규모를 줄여 나가느라 안간힘을 쓰는 가정이 한둘이 아니다.

허리띠를 졸라 매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허리띠를 졸라 매는 것만이 전부여선 안된다.

졸라 맨 허리띠는 언젠가 다시 늦출 수 있다. 지금 이 시기에 우리가 바로잡아야 할 것은 보다 근본적인 생활문화다.

내가 아는 어떤 가정은 전등을 갈아 끼울 때마다 동네 전파상을 부른다.

네 명의 가족이 살고 있지만 아무도 전기를 다룰 줄 모르기 때문이다.

아파트 벽에 못을 제대로 박을줄 모르는 가장 (家長) , 이삿짐도 못 꾸리는 가정이 우리 주위에 널려 있다.

선반 하나 매다는 데도 목수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 뿐인가.

근로자 가구중 세 가정에 한 집 꼴로 맞벌이지만 우리의 생활문화는 여전히 집안일 = 주부 몫이다.

자기 방 청소도 하지 않는 아이들은 누군가가 챙겨주지 않으면 식사도 못하는 어른으로 자라나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너는 공부나 해라' 는 식의 가정교육이 빚어낸 결과다.

자가용을 가지고 있는 프랑스인 다섯 명중 네 명은 웬만한 자동차 고장은 스스로 부품을 사서 고친다고 한다.

인건비가 비싸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진국 가정에선 제일 먼저 각종 공구를 구입한다.

그러나 우리네 가정 가운데 공구를 제대로 갖추고 있는 가정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 다.

사 (士).농 (農).공 (工).상 (商) 의 유교적 계급질서는 사라졌지만 육체적인 일을 극도로 싫어 하는 전통은 여전하다.

그러나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전등을 갈아 끼우는데 5천원 안팎의 출장비를 대수롭지 않게 치를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흡사 자동차 주치의처럼 걸핏하면 인근 카센터에 들르던 것도 이젠 쉽지 않다.

가계의 부담을 줄이겠다고 중형차를 경차로 바꾸는 것만으론 불충분하다.

직접 부동액 갈기.체인 감기에 나서는 것을 생활화해야 근본적으로 자동차 유지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사람들에게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변화가 두려워 피하는 자와 변화를 즐기는 자, 그리고 내면의 두려움과 싸우며 변화를 쫓아가는 자.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변화를 싫어한다.

안락한 생활을 영위해 온 이들일수록 더욱 그렇다.

1만달러 소득시대를 누려 온 우리들도 그랬다.

그러나 작금 우리가 맞고 있는 국제통화기금 (IMF) 시대는 싫든 좋든 변화의 한가운데로 우리를 끌어내고 있다.

어차피 변화의 물결을 피할 수 없다면 이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비단 생활문화뿐이 아니다.

작게는 가정에서, 크게는 국가에 이르기까지 구석구석마다 주춧돌을 놓는 심정으로 우리 모두가 다시 시작한다면 오히려 21세기를 다짐하는 도약의 발판을 이룩할 수도 있으리라. 한 미래학자는 오늘날의 사태를 '자급자족의 산업형 국가 체계가 무너지고 상호 의존의 권역형 국가로 옮겨 가는 단계에서 파생되는 구조조정의 일환' 이라고 정의한다.

기술과 경제뿐 아니라 정치.도덕.사회.제도 일반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고통을 수반한 구조조정을 요구한다는 '제3의 물결' 인지도 모른다.

위기와 기회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활용하기에 따라 위기는 기회도 된다.

IMF 시대는 이미 열렸다.

이것이 우리 역사에 긍정적으로 기여하게끔 만드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화 (禍)가 복 (福) 된다' .조상 대대로 전해져 온 우리 속담이 더욱 간절해지는 무인년 (戊寅年) 이다.

홍은희<생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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