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년 신춘중앙문예}시 당선소감…"행복과의 만남 오래도록 이어졌으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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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얼마 전 작은 동인지에서 '없어진 시' 라는 제목만 있고 한 줄의 글도 적혀 있지 않은 시를 읽고 전율을 느낀 적이 있다.

말 많고 탈 많은 세상을 향해 마스크를 쓴 언어들이 귓전을 후려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지금 그런 여유를 부릴 수가 없다.

이 순간이 오기를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데…. 내가 쓴 시의 제일 첫 독자가 되어 주고 편파적인 나의 시평에 맹종을 강요당하는 기구한 운명의 세 사람. 남편 두곤 씨와 민이 주리 이젠 내가 하얀 종이만 들고 있어도 귀를 틀어막고 도망가는 그들에게 엄마가 글쓰는 괴물이 아니었다는 변명도 해야 되고, 옷에 붙은 껌처럼 문자의 다리와 겨드랑이에 빌붙어 있는 마침표.쉼표.물음표.느낌표.따옴표 등을 나의 시에선 제거해 버렸고, 문명이란 물질에 묻혀 빠른 속도로 부식되어 가는 모든 존재들의 본 이름을 찾아 주는 시를 써 보겠다는 것이 내 생각의 첫 작업이었다고 설명해야 되고, 문자들이 이젠 살 것 같다며 고맙다고 말했다는 것도 전해야 된다.

봄이 되면 사람의 몸 어디에 좋은 약인지 돋아나면 뜯기고 돋아나면 뜯기는 소리 없는 혈전을 치르는 마을 뒷산 약수터 가의 홍장목 나무에게 모두들 미안해하고 있다고 전해야 되고 죽자사자 그 싹을 뜯어 가는 거동이 몹시 불편한 노인의 그 느려진 생을 위해 모두들 두 손 모으고 있다고 전해야 된다.

나에게 이렇게 행복한 날이 준비되어 있는 줄 누가 귀띔이라도 해주었으면 살아 온 날만큼 나는 소롯이 행복했을 텐데…. 아 지금 이대로 오래오래 살아 있고 싶다.

◇ 조윤희

▶1955년 경남 마산 출생

▶제3회 동서커피 문학상 대상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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