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 칼럼]청와대를 탈출하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김대중 차기대통령이 청와대비서실을 대폭 축소하고 국정을 장관들과 직접 논의하겠다고 한 것은 맞는 말이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지금껏 대통령은 청와대라는 구중심처 (九重深處)에 들어앉아 측근에게 둘러싸인채 국정의 한단계 초월자 (超越者) 인양 "최선을 다하라" "만전을 기해달라" 는 하나마나한 지시만 해온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바로 국정현장에 나서고 국정의 중심에 자리잡기 위해서는 비서실 축소만으론 부족할 것 같다.

지금처럼 청와대 본관의 집무실에 앉아 있어서는 대통령이 비록 의욕을 갖고 열심히 챙긴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도 모르게 현장과 현실에서 멀어지는 현상을 빚을 가능성이 많다.

청와대가 어떤 곳인가.

청와대로 가는 효자동길에서 청와대 쪽으로 갈수록 주변 공기는 삼엄해지고 마음 약한 사람들은 가슴이 서늘해진다.

몇 겹의 경비.경호의 선을 지나 본관에 들어서면 그 장중한 건물과 엄숙한 분위기에 또 한번 기가 꺾인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대통령을 만나면 이미 기가 죽은 면담자가 그앞에서 바른말을 하고 이견을 제시하기는 많이 어렵게 된다.

흔히 TV에서 보면 청와대회의에서 참석자들이 장.차관 할 것 없이 대통령 말씀을 메모하고 있는데, 나중에 말씀 내용을 알고 보면 도대체 왜 메모했는지 모를 정도로 평범한 얘기가 대부분이었다.

지금껏 청와대란 그런 곳이다.

또 대통령이 별관에 있는 비서실장이나 수석비서관을 부르면 자동차를 타고 빨리 와도 5분은 걸린다.

종합청사의 장관을 급히 찾아도 10분은 걸릴 것이다.

이런 물리적 거리가 문제가 아니라 대통령과 그밑의 참모.장관이 이렇게 서로 떨어져 있음으로 해서 의사소통.정보교환.일하는 시스템이 막히고 경직된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지금의 구조라면 청와대는 외부와 단절된 '궁중' 이다.

총리와 장관들이 수시로 들락거리고 일상적으로 대통령에게 보고.협의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돼 있는 것이다.

그러잖아도 막강한 권력을 쥔 대통령에겐 접근이 어려운 법인데 이런 궁중 속에 있게 되면 원래 민주적인 인물도 오래 안가 권위주의화하고 더 현실과 괴리된다.

역대 대통령의 비서실이 권력을 틀어잡고 내각의 상전 노릇하는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국정의 책임은 장관이 지고 있는데 대통령을 끼고 있는 수석이 장관의 상관 노릇을 하니까 장관이 자기 부처를 장악하지 못하고 각 부처는 비서실 눈치를 보게 되는 국정난맥이 오는 것이다.

金당선자가 정말 국정현장에서 장관들과 직접 국정을 논의하겠다는 좋은 뜻을 살리자면 "궁중을 벗어나라" "청와대를 탈출하라" 고 말하고 싶다.

청와대를 떠나 내각이 있는 종합청사에 대통령 집무실을 두면 어떨까. 종합청사에 집무실이 있으면 총리와 장관이 수시로 와서 보고.협의할 수 있고, 필요한 경우 대통령이 직접 총리실이나 장관실에 갈 수도 있다.

국무회의도 대통령이 직접 주재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돼야 정말 정부가 대통령을 중심으로 팀워크를 이루고 장관은 책임지고 국정을 추진할 수 있게 된다.

또 그래야 내각 활성화도 되고 대통령의 권위주의화 현상이나 비서정치.측근정치의 소지도 막을 수 있다.

청와대는 그냥 대통령 관저와 회의실 등으로 쓰면 되고 혹 일부시설을 영빈관으로 쓸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만일 경호나 사무실 확보 등의 어려움 때문에 종합청사에 집무실을 두기 어렵다면 차선책으로 최소한 청와대안에서라도 집무실을 비서실 - 보좌관실의 한가운데 두는 게 좋다.

그래야 대통령 - 참모간 장벽이라도 없어질 수 있고 대통령이 한걸음 더 국정현장에 다가갈 수 있다.

어떤 방법으로든 대통령이 '궁중' 에 있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 백악관이 그런 구조라고 한다.

백악관에서는 참모들이 손쉽게 집무실에 들어가고 대통령도 수시로 참모들의 방을 찾는다고 한다.

이처럼 대통령의 정위치를 현재와 같은 '협의할 수 없는 구조' 에서 '최대한 협의 가능한 구조' 로 바꾸어야 한다.

대통령을 잘 모시는 것은 지금까지 처럼 권위와 위엄을 치켜세우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 '일' 을 더 잘 할 수 있게 하는 것이고, 그러자면 일을 잘 할 수 있게 하는 시스템과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송진혁<논설실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