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고은이 읽은 '신영복의 엽서'…각성호소 메아리 되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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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기억에 남겨둘만한 것이었습니다.

“당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엽서를 끝내고 옆에다 태산일출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한 후에 그림 속의 해를 지웠습니다.

물론 일출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태산에 아침해를 그려넣는 일은 당신에게 남겨두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신영복 교수가 보낸 엽서의 마지막회는 단원을 이루고 있습니다.

지난 1년동안 나는 이 아름다운 편력의 기록을 읽었습니다.

모진 시련은 인간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드물게는 그것은 인간을 승화시키기도 합니다.

신교수는 지난날 긴 시간의 시련을 통해서 그 자신을 어떤 증오나 착각에 파묻히게 하는 교조적 황폐화 대신 그 자신을 간단없이 단련하였습니다.

그 정신으로서의 절도 (節度) 는 가이 수행의 그것이었고 고금을 오고간 지식의 오랜 섭렵은 순결한 기도와도 방불하였습니다.

그래서일까, 그의 유려한 글솜씨는 상당한 풍류가 깃들어 있는 회화성과는 또다른 화음을 울려주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글은 그간 우리가 자칫 잊을뻔한 여성 혹은 모성의 미학을 갖춘 경어체로 이어지면서 세상의 여러 도그마들과도 쉽사리 대립하지 않는 유연한 화해를 만들어냅니다.

그가 아무리 지친 걸음으로 다니는 동안이라도 정신의 행적 (行跡) 을 항상 초원 위에 남기고 있는 듯 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가장 인간적인 대화 형식인 2인칭의 서간문예 (書簡文藝)에 대한 새로운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자기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일이야말로 인간에게 있어야 할 시간의 기품이 됩니다.

나는 지난날 인도 중앙정부에 보관된 공문서를 구경한 적이 있는데 그것들은 한결같이 정중한 편지로 되어있는 것에 놀란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전신 그리고 컴퓨터 체제에도 불구하고 옛날의 붓글씨나 깃털펜으로 쓴 육필 편지들은 그것이 신교수의 '국내엽서' 와 '해외엽서' 의 한자 한자 새겨넣은 듯한 글들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어떤 진실은 그것이 고백을 닮을 때 더욱 진실하게 됩니다.

신교수의 지적 염원이 유감없이 반영된 이번 연재 산문은 그런 고백과 동행하는 신비를 슬쩍슬쩍 내보이기도 합니다.

나는 그의 춤추는 옛사람과 같은 활달한 붓글씨도 싫어하는 편이 아니지만 그의 그림이 보여주는 묘법을 무척 좋아합니다.

때로는 유영국 (劉永國) 과도 가깝고 때로는 잘 발효된 신남화 (新南畵) 의 격조도 곁들이는 동안 그것은 서양의 솔직한 색상이나 동양의 여백이나 갈필 (渴筆) 의 지조를 고루 넘나들고 있습니다.

과연 그가 찾아간 새로운 세기에의 예감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제까지 살아온 시대와 지역에서의 성장소설적 문화를 지향할 때 만날 수 있는 인간 자신의 새 각성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문명의 시원인 나일강 기슭이나 르네상스시대의 라틴세계와 아직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어떤 곳의 자연과 역사의 유산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축복이기도 한 것입니다.

고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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