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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일모도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요즘 '일모도원 (日暮途遠)' 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이 많다.

'해는 저물어 가는데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멀다' 는 뜻이다.

새해를 맞는 문턱에 서게 되면 이런 저런 기대에 부풀게 마련인데 이번 세밑 만큼은 새해는커녕 다음달을, 아니 당장 정초에 어떤 일이 벌어질는지를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형편이니 이런 분위기에 꼭 들어맞는 표현인 셈이다.

하지만 '일모도원' 이란 어휘에 담겨 있는 본래의 뜻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뜻과는 거리가 있다.

이 말을 만들어 낸 사람은 중국 춘추 (春秋) 시대의 오자서 (伍子胥) 다.

그는 본래 초 (楚) 나라 사람이었으나 태자 (太子) 의 스승이었던 그의 아버지와 형이 모함을 받고 죽임을 당하자 오 (吳) 나라로 망명한다.

초나라에 대한 원수를 갚으려 기회를 엿보던 오자서는 왕위를 노리는 공자 광 (光) 을 은밀히 돕는 한편 오나라로 하여금 초나라를 치게 한다.

광이 왕위에 오르고 초나라가 망하게 되니 오자서의 잔인한 복수가 시작된다.

아버지와 형을 죽인 평왕 (平王) 이 이미 죽었기 때문에 오자서는 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꺼내 곤장 3백대를 때렸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모함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을 샅샅이 찾아내려 미친 듯 날뛰었다.

이 소식을 들은 가까운 친구가 편지를 보내 '보복이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고 타일렀다.

이때 오자서의 대답이 '일모도원' 이었던 것이다.

연관지어 풀이하자면 '복수할 시간은 다 돼 가는데 복수할 일은 아직도 많이 남았다' 는 뜻일 터이다.

그렇게 보면 보너스 반납이니 무급휴가니 감봉이니 해서 잠 못 이루는 직장인들의 '일모도원이라!' 는 탄식은 좀 엉뚱한 측면도 있지만 '할 일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 는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시련을 딛고 일어서는 스스로의 채찍질로 뒤바꿀 수도 있다.

'채근담 (菜根譚)' 은 "역경 (逆境)에 있을 때는 주변의 모든 것이 약이 되므로 모르는 사이에 절조 (節操) 와 행실을 닦게 된다" 고 가르친다.

"겨울이 온다면 봄인들 멀쏘냐" 는 셸리의 시구도 진리며 또한 하늘의 섭리다.

지금 우리는 겨울을, 그것도 아주 혹독한 겨울을 맞고 있다.

그러나 봄은 어김없이 온다.

겨울을 어떻게 견디느냐에 따라 봄의 모습이 달라지듯 세밑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새해의 모습도 달라진다.

할 일은 아직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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