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을 보는 냉소적 시각, 그게 맘에 들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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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털털거리는 1990년식 고물 사브를 몰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핸들을 두들기는 이 남자는 명백히 구식이다. 손질 안 된 길고 덥수룩한 머리에 불규칙한 식사와 정크푸드 섭취로 인해 찐 듯한 살, 입었다기보다는 걸쳤다는 표현이 더 맞는 행색이 이런 의심을 부추긴다.

20년 경력의 베테랑 기자 칼 매카프리를 연기한 러셀 크로. 무대가 된 신문사는 워싱턴 포스트 내부를 참고한 것이다. 영화 제목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는 ‘현재까지 진행된 상황’을 뜻하는 표현이다. [UPI코리아 제공]

30일 개봉하는 정치스릴러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의 주인공인 유력일간지 ‘워싱턴 글로브’ 기자 칼 매카프리. ‘워싱턴 포스트’를 모델로 했다는 지저분한 편집국이 집처럼 편안해보인다. 이런 그의 면모에서 민완기자에 대한 할리우드의 고정관념이 읽힌다. 기자가 봐도 진짜 기자 같은 칼 역의 러셀 크로(45)를 지난달 런던 도체스터 호텔에서 세계 각국 기자들과 함께 만났다.

BBC 동명 미니시리즈를 원작으로 한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는 워싱턴 정가의 음모를 다룬 케빈 맥도널드 감독의 작품이다.

‘프레스 프렌들리’하지 않기로 정평난 배우 중 하나인 크로가 기자 연기라니? 배역을 제안받았을 때 그 역시 의외라는 생각을 하긴 한 모양이다. “기자? 사람을 잘못 찾아온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고 하니 말이다.

이날도 그는 “이 영화를 찍은 후 기자들에 대한 태도가 (호의적으로) 바뀌었다고 맥도널드 감독이 그러더라”고 기자들이 말하자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일축했다. 하긴 파파라치가 주7일 잠복근무하는, 세계에서 가장 야만적인 언론이 존재하는 호주에서 유명 배우로 살아가려면 이 정도 까칠함쯤이야 기본인지도 모른다.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는 기자와 정치인에 관한 영화다. 동시에 우정과 진실 사이를 방황하는 한 인간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잘 나가는 국회의원 스티븐(벤 애플렉)과 부적절한 관계에 있던 보좌관이 의문의 지하철 사고로 죽는다. 스티븐의 절친한 친구이자 유력지 기자인 칼은 자신이 취재하던 총격사고와 거대 보안기업이 얽힌 이 사건이 관련 있음을 알아낸다. 스릴러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이 영화를 보다 흥미진진하게 보려면 반전을 의식해 미리 긴장하며 퍼즐을 끼워맞추는 시도는 금물이다. 자칫 잘못하면 사사로운 감정과 도덕적 책무 사이의 충돌, 저널리즘의 본령과 미디어산업의 위기 등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편집장으로 등장하는 연기파 배우 헬렌 미렌(左).


이날 인터뷰장에 모인 기자들은 기사를 위해 앞뒤 재지 않고 무소처럼 돌진하는 칼의 프로정신에서 모종의 향수와 경외심을 느끼는 듯 했다. 하지만 그의 해석은 좀 달랐다.

그는 “칼은 결코 기자로서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못박았다. “난 저널리즘의 객관성이 허구일 수도 있다는 영화의 냉소적인 시각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절친한 친구의 정치생명이 위기에 처하자 이 유능한 기자가 가장 먼저 한다는 생각이 ‘어떻게 하면 내 힘을 이용해 친구를 돕는가’하는 것이었죠. 어찌 보면 당연해요. 기자도 인간이고 저널리즘도 결국 인간의 영역이니까요.”

보좌관 살인사건 보도를 놓고 벌어지는 신문사 내부의 좌충우돌은 칼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공과 사의 싸움과 함께 이 영화를 생기있게 만드는 대목이다. 퇴조하는 신문산업, 블로그로 대표되는 인터넷 미디어의 득세, 광고를 의식한 흥미 위주 기사의 우선배정 등 현실이 고스란히 반영됐다.

크로는 “인터넷에 사소한 얘기는 넘쳐나지만, 진정한 정보는 없는 시대” “기자는 고귀한 직업이지만 그 고귀함을 지키려면 (신뢰성 있는 보도와 같은) 진지함과 노력이 필요하다” 지적을 했다. 영화 막바지, 방황을 마치고 진실의 자리로 되돌아온 칼이 “누군가 진실을 써주길 원하는 독자들이 내일 아침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던 대목이 그의 진지한 어조와 겹쳐졌다.

런던=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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