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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단 공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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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다음 중 명단 공개 대상이 아니었던 사람은? ①청소년 대상 성범죄자 ②병역기피자 ③대학 부정입학자와 학부모 ④부동산 투기자 ⑤고액 세금 체납자

정답은 없다. 모두 과거에 명단이 공개된 적이 있다. 이뿐인가. 1980년대 초반엔 양담배를 피우다가 적발된 사람의 명단이 공개됐다. 정부는 또 호화 혼수품을 주고받는 등 가정의례준칙을 위반한 사람이나 호화.사치 생활자, 10부제를 위반한 고급 승용차 소유자 등의 명단 공개를 검토하겠다고 발표하곤 했다. 심지어 심야 유흥업소나 퇴폐 이용업소 출입자의 명단을 공개하겠다고 나선 적도 있다.

89~90년 국세청이 부동산 투기자의 명단을 공개했다. 그러나 사생활 침해 및 과잉 처벌이라는 비판 때문에 공개 내용은 '김△△, 00세, 여, 서울 □□구 ◇◇동' 정도에 그쳤다. 국세청의 소극적인 명단 공개 때문에 나머지 신상 파악은 기자들의 몫이었다. 당시 국세청 출입기자들은 공동으로 인명록을 뒤지고 동사무소를 찾아가 유명 인사 및 기업인의 가족들을 추적해야 했다.

당시 명단이 공개된 투기 혐의자 중 나중에 투기 혐의가 벗겨지자 정부를 상대로 명예훼손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해 승소한 사람도 있었다. 93년엔 교육부가 발표한 대학 부정입학생 명단 중 일부의 경우 부정 입학이 아니라 컴퓨터 사무착오로 인한 입학이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약혼 상태에 있던 한 여학생이 파혼을 당하는 등 당사자들의 피해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명단 공개의 피해자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에서도 미성년자 성범죄자 등의 명단을 공개하곤 한다. 이들에 대해선 사실상 사회 격리가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취약한 행정능력을 보완하기 위한 수단으로, 또는 사회 분위기에 편승해 명단 공개가 동원될 때가 많다. 국세청은 오는 9월 고액 세금 체납자의 명단을 공개할 예정이다. 이에 앞서 대상자에게 사전 통보서를 보내자 51명이 밀린 세금 141억원을 냈다고 한다. 국세청은 명단 공개의 효과가 입증되었다고 자랑하는 모양이지만, 체납 세금을 정상적으로 추징할 능력이 없음을 자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세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