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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여름나기 엿보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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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날이 참 덥다. 한낮 작열하는 태양 아래를 걷노라면, 바짝 단 대지를 식혀줄 한 줄기 소낙비가 오히려 그립다. 며칠 전 조선 후기의 문인 노긍(盧兢.1737~90)의 문집을 뒤적이다가 '소낙비'란 제목의 시를 읽고 눈이 반짝 떠졌다.

바람이 쾅 사립문 닫자/새끼제비 놀라는데/소낙비 빗기더니/골 어귀로 몰려가네/푸른 연잎 삼만 자루에/흩어져 쏟아지니/떠들썩 온통 모두/갑옷 군대 소리로다

風扉自閉燕雛驚 急雨斜來谷口去

散入靑荷三萬柄 盡作鐵軍聲

시인은 푹푹 찌는 한낮의 더위에 속수무책으로 앉아 있다. 좀전부터 사립문이 끄덕끄덕 하다가, 제풀에 쾅하고 닫힌다. 둥지에 틀어박혀 제 어미가 먹이 물어오기만 기다리던 새끼제비들이 문 닫히는 소리에 일제히 소스라친다. 이윽고 한바탕 거나하게 소낙비가 퍼붓는다. 45도 각도로 빗겨 쏟아지는 장한 기세에 고약처럼 엉겨 붙었던 땅에선 김이 무럭무럭 올라온다. 소낙비는 자꾸 각도를 눕히면서 제비둥지까지 들이칠 기세다. 어미제비는 아까부터 소식이 없고, 새끼들은 기둥을 할금대며 처마 밑을 엿보는 소낙비의 기세가 자꾸 불안해 어쩔 줄 모른다.

한참을 기둥의 눈금과 드잡이질하던 소낙비는 아무래도 싱겁다는 듯이, "딴 데 가 놀자"하며 골 어귀 연꽃 방죽 쪽으로 우르르 몰려들 간다. 소낙비는 푸른 연잎 삼만 자루가 방패처럼 하늘을 향해 팔벌리고 서 있는 속으로 곧장 쳐들어간다.

후두두두, 더위에 혀를 빼물며 섰던 연잎들은 느닷없는 소낙비의 습격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한번 당해 보겠느냐며 소낙비는 한꺼번에 방죽 위로 총알을 들이붓는다. '따다다다…' 갑옷입은 소나기 군단과 이를 막는 방패 부대 사이에 순식간에 일대 격전이 벌어진다. 연못은 아연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피 튀기는 소리 낭자한 전쟁터로 돌변한다. 생각만 해도 속이 다 후련해지는 광경이다.

내친 김에 '초가을'이란 작품을 한 수 더 읽었다.

엷은 구름 성근 버들/둘 다 모두 가을인데/방죽을 바라보니/물 기운 오싹하다/물총새 고기 채다/번번이 놓치고선/푸른 연밥 꼭대기에/돌아와 앉는구나

澹雲疎柳共爲秋 閒看池塘水氣幽

靑鳥掠魚頻不中 還飛端坐碧蓮頭

그렇게 한여름을 보내고, 하늘엔 어느새 못 보던 양털구름이 얇게 깔렸다. 버들가지도 추레해졌다. 지난 여름 소낙비와 연잎이 전투를 벌이던 방죽가를 거닐자니 물에도 문득 가을 기운이 감돈다. 연못 위로 솟은 푸른 연밥 꼭대기에 조그만 물총새 한 마리가 꼼짝않고 앉아 있다. 방해하지 않으려고 멀찍이 떨어져 나도 앉는다.

이윽고 수면이 출렁한다. 물총새는 총알 같이 수면 위로 내리꽂힌다. 하지만 입에 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멋쩍어 후루룩 날아가는가 싶더니 다시 와 앉는다. 그는 지금 배가 고픈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유현(幽玄)한 집중. 겉보기엔 도 닦는 스님 같은데, 속마음은 얼마나 복잡할까? 문득 고개 들어 바라보면, 양털구름이 배를 깔고 산마루를 넘어간다.

앞서 연잎 위로 튀어 오르는 소낙비 소리를 들을 때는 폐부까지 시원하더니, 가을 물가 연밥 위에 앉은 물총새의 푸른 깃을 생각하니 마음 한자락에 서늘한 기운마저 가득차 온다.

노긍! 그는 참 고단하고 힘겨운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시 속의 그는 조금의 구김살이 없다. 더운 여름, 연구실에 앉아 이렇게 200여년 전 한 선비의 여름나기를 슬쩍 엿보며 무더위를 건너가는 재미가 뭐라 말할 수 없이 상쾌하다.

정민 한양대 교수.한문학

◇약력:한양대 국문과 졸업, 동 대학원 문학박사, 현 한양대 국문과 교수

*** 바로잡습니다

7월 3일자 26면 '삶과 문화'난에 실린 정민 교수의 칼럼 '선비의 여름나기 엿보며' 중 노긍의 시 "… 盡作鐵軍聲"에서 자가 제작상 오류로 탈락되었기에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