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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원동력은 ‘관용’ 정신 우리는 다인종사회 준비돼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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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세계제국 로마는 처음에는 작은 도시국가에서 시작했다. 전설에 의하면 기원전 13세기 트로이 왕족 아이네아스는 트로이 멸망 후 일족을 이끌고 탈출, 천신만고 끝에 로마 근처의 해안에 상륙했다. 그 후 수백 년이 지나 아이네아스의 후손 중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등장해 기원전 753년 4월 21일 테베레 강가에 도시국가를 건설했다. 로마 카피톨리니 미술관에는 ‘쌍둥이 형제에게 젖을 먹이는 늑대 상’이 전시돼 있다(사진). 그러나 형제간에 싸움이 벌어졌고, 레무스는 로물루스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 뒤 로물루스는 자기 이름을 따 나라 이름을 로마라고 정했다.

라틴족으로 출발한 로마 왕국이 맨 처음 갈등을 빚은 것은 인근의 사비니족이었다. 로마는 네 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했지만 사비니족을 강제로 합병하지 않았다. 사비니족의 왕과 로물루스가 공동으로 왕이 된 것이다. 결국 로마는 두 명의 왕을 모시게 됐다. 사비니족의 자유민에게는 로마인과 똑같은 완전한 시민권이 부여됐다. 패자인 사비니족으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는 대등한 합병이었다.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패자조차 자기들에게 동화시키는 이 방식만큼 로마의 강대화에 이바지한 것은 없다’.

로마와 인접한 에트루리아의 주민 중에는 이민족을 차별하는 에트루리아 사회의 폐쇄성에 실망하고 새로운 거주지로 로마를 선택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로마는 이를테면 ‘기회의 땅’이었다. 로마의 ‘관용’ 은 공화정·제정으로 이행된 뒤에도 계속 유지됐다. 1790년 미국 헌법의 기초자 중 한 사람인 제임스 윌슨은 이렇게 말한다. ‘로마인은 자국의 힘을 전 세계로 확장하려 한 것이 아니라, 세계의 주민들이 자진해서 로마로 쏟아져 들어왔다.’ 관용이야말로 로마가 뻗어나갈 수 있었던 비결이라는 것이다.

학자들은 2020년이 되면 외국인과 이주민이 더욱 증가하면서 우리 사회가 인종적·민족적·문화적으로 더욱 다양해질 것으로 전망한다. 한국 사회가 포용하지 못할 경우 이들은 하층계층을 형성하고 사회불안을 가중시키게 된다. 이들로 하여금 한국 사회의 기회구조에 공평하게 참여하고 한국인으로서 소속감을 갖게 하는 것은 우리 사회 발전의 중요한 조건이다. 생존을 위해서라도 관용을 배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동족’끼리도 이념과 지역으로 편을 갈라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쉽사리 ‘이민족’에 대한 관용을 배울 수 있을지 우려된다.

박상익(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