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눈]박정희와 박태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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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주 (周) 문왕은 재계 (齋戒) 후 위수에서 낚싯줄을 드리운 강태공 (姜太公) 을 얻었다.

태공은 "군자는 그 뜻을 얻는 것을 즐거워하고, 소인은 뭔가 얻기를 즐거워한다" 고 말했다.

강태공은 낚시에 비유, "낚은 고기의 크고 작음에 따라 그 쓰임이 다른데, 이는 사람마다 소질과 능력에 따라 알맞은 지위나 역할을 부여하는 것과 같다" 고 문왕에게 말했다.

박정희 (朴正熙) 와 박태준 (朴泰俊) 간 관계를 이 고사에 끌어들이는 것은 견강부회일지 모른다.

그러나 포철 (浦鐵) 성공사를 엮어낸 양자간 관계는 이 고사에서 어느 정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박태준 자민련총재는 포철신화를 일궈낸 정치가다.

박정희 대통령 (육사2기) 은 육사교관 시절 이래 후배 박태준 (육사6기) 을 아껴 5.16이후 최고회의의장 비서실장으로 앉혔고, 그 후 대한중석사장으로 내보냈다.

朴씨는 만년 적자의 국영업체 대한중석의 경영을 맡은 후 곧 흑자를 냈을 만큼 관리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다.

朴대통령은 재임초기 철강산업을 독립국가의 '위신 (威信) 이 걸린 산업' 으로 설정, 68년 朴씨를 사장에 기용해 79년 흉탄에 쓰러질 때까지 흔들림 없이 보호했다.

朴대통령이 朴사장을 어느 정도 신임하고 보호했는가는 朴씨가 당한 여러 차례의 모함을 모두 막아준 예에서 잘 드러난다.

우선 예비역 장성들의 유신 (維新) 지지 성명에 예비역 소장인 그가 서명을 안하자 중앙정보부장이 朴대통령에게 이를 고해바쳤지만 朴대통령은 "강요하지 말라" 고 朴사장을 감쌌다.

70년대 중반엔 스위스제 설비 대신 오스트리아제를 도입한 것이 화근이 돼 朴사장의 서울 자택이 어느 날 느닷없이 모 기관원들의 구둣발에 짓밟힌 채 가택수색을 당했다.

도입선이 달라진 것은 朴사장이 외국 커미션을 착복했기 때문이라는 모함투서가 발단이었다.

정밀한 가택수색과 조사 끝에 중상모략임이 밝혀졌다.

朴대통령은 이를 안 직후 포철을 방문, "내가 임자를 신임하면 되지 않느냐" 고 다독거렸다.

朴대통령과 朴사장이 모두 강태공의 고사를 의식했는 지의 여부는 모르겠다.

그러나 朴대통령은 큰 밑그림을 그리고, 그 쓰임새에 맞는 적임자를 인선해 그 임무만 맡기면서 끝까지 후원했다.

朴사장은 朴대통령의 지우 (知遇) 와 전폭적 신임을 얻은 것을 낙으로 삼아 한눈 팔지 않고 그 임무완수만 필생의 업 (業) 으로 여겨 돌진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회자되는 포철성공 신화는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두가지 점에 주목한다.

조국근대화에 신명을 바치며 조바심치던 朴대통령이 재임 후반기쯤 관리능력이 탁월한 朴사장을 정부 요직에 등용, 보다 효율적이고 빠른 경제성장을 도모했을 법도 하지만 한번도 그를 정부요직에 끌어들이지 않았다는 점이 그 하나다.

인지상정으로 보면 朴사장도 더 큰 자리에 대한 탐심 (貪心) 이 있었을 법한데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 다른 하나다.

朴대통령은 朴사장의 기국 (器局) 을 재서 그 용도에 맞게 활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실제로 이론 및 실물감각에 각기 밝은 학자와 기업출신 장관들이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곤 실패의 평가를 받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김영삼 (金泳三) 대통령의 인사행태는 결과적으로 IMF 관리체제를 몰고 온 한 요인이 됐다고 생각한다.

金대통령은 지난 5년간 경제부총리 7명을 포함해 장관 1백18명을 양산했다.

그릇에 안맞는 인물을 등용해 업무파악이 될 때 쯤이면 갈아치우는 판이니 정부가 제대로 굴러가길 기대한다는 것은 애시당초 잘못이었다.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당선자와 그 주변이 인사 (人事)에 참고할 대목이다.

그릇에 맞는 적임자의 인선과 신뢰 부여가 요체라는 것이다.

부름을 받은 인물도 그 자리에서 온몸을 던져야지 더 큰 자리를 향한 징검다리로 생각해선 안된다는 메시지다.

그리고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천하" 라고 문왕을 계몽한 강태공의 말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

이수근<편집부국장 겸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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