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로 짚은 97]영화계…늘어난 관객, 위기속 '희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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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영화계의 97년은 한국영화가 관객동원에서는 유례없는 성공을 거두었으면서도 위기론이 확산되는 모순된 한 해였다.

지난해 2편 ( '은행나무 침대' . '투캅스2' )에 불과했던 관객30만명 이상 (서울 기준) 이 6편으로 늘어났다는 사실은 상업영화의 가능성에 대한 고무적인 현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작비 상승에 따른 적자누적과 대기업의 투자위축으로 인한 제작자본의 감소는 연말의 IMF한파와 함께 영화계에 찬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올해 제작편수가 57년 이후 40년만에 60편 이하인 58편 (심의신청 기준) 으로 떨어졌고 앞으로 더욱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해지면서 제작비 절감 등 자구책을 마련하려는 움직임들이 가시화된 해이기도 하다.

88년 직배영화 허용으로 토착자본이 쇠퇴하는 변화를 맞게 된 영화계는 90년대 들어 대기업들이 제작과 외화수입에 대거 참여하면서 급속한 자본구조의 재편을 가져왔다.

올 한해 우리 영화계를 심란하게 만든 위기론은 바로 이 대기업자본의 움직임과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영화제작 경험이 전무한 대기업자본에의 지나친 의존이 보이지 않게 초래한 문제점들이 올해 대기업의 투자위축과 함께 한꺼번에 불거져 나왔기 때문이다.

올초 제일제당의 '인샬라' , SKC의 '용병 이반' , 대우의 '불새' 등 대작들이 흥행에서 참패하면서 투자를 꺼리기 시작한 대기업들의 움직임은 당장 영화계의 자금줄이 막히는 결과를 가져와 실업자가 양산되고 있고, 영화산업의 기초가 흔들리고 있다는 지적을 낳고 있다.

제작비절감이 절실한 대책으로 논의되는 것은 관객동원면에서는 올해가 그런대로 성공적인 한 해였기 때문이다.

특히 '접속' 의 흥행에 이어 제작비 10억원 미만의 '편지' '올가미' 등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순제작비를 7~8억원에 맞추는 대안들이 논의되고 있다.

대기업의 투자위축과 함께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의 성공적인 개최는 한국영화의 작품성 문제를 제기했다.

이란.일본.대만의 영화들과의 비교를 통해 작가정신이 돋보이는 문제작들이 없다는 점이 확연히 드러났기 때문. 이 또한 대기업의 상업자본에 의존하는 제작풍토, 단편영화.독립영화 등 '작은' 영화의 실험정신을 외면하는 분위기와 정책에 대한 반성을 가져왔다.

부산국제영화제 이후 작가정신.표절문제.독립영화.아시아영화의 정체성을 주제로 한 세미나들이 잇따라 열려 논의의 장이 마련되기도 했다.

'작은' 영화들과 연관해 빼놓을 수없는 문제가 심의. 지난 10월 영화진흥법이 개정.발효되고 공륜 대신 명목상 자율기구인 공연예술진흥협의회가 출범해 수입추천과 등급심의를 하기 시작했지만 아직까지는 별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는 형편이다.

지난 7월 동성애를 그린 '부에노스 아이레스' 의 수입불허로 시작된 심의문제는 퀴어영화제의 무산, 인권영화제대표인 서준식씨의 구속, 부천영화제와 부산영화제에서의 일부 작품 제한 상영 등 여전히 불씨를 지닌 문제로 떠올랐다.

특히 개정된 영화법에서도 소형.단편 영화에 대한 심의 면제가 이루어지지 않아 해결돼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상업영화가 감독 보다는 기획위주의 제작시스템으로 이루어지는데 반해 소형.단편영화 등 독립영화적인 작품들이 활성화되어야만 감독의 개성이 살아있는 작품들이 만들어질 수있기 때문이다.

외화 흥행에서는 10위 중 '제5원소' 와 '쇼킹 아시아' 를 제외한 8편이 직배영화로 여전히 직배영화가 시장을 지배하는 양상을 보였다.

IMF한파로 국내영화사들의 외화수입이 극도로 위축되면 직배영화들의 입지가 더욱 넓어질 것이라는 우려를 낳고 있다.

이 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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