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채장수 장태영씨의 장애인돕기 7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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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인심은 아직 얼지 않았다 - .고아원.양로원을 찾는 '큰 손' 들의 발길은 뜸해졌다지만 어려운 때일수록 먹고 살 걱정만은 서로 나눠야 하지 않겠냐는 서민들의 마음은 변함이 없다.

야채장수 장태영 (張泰榮.57.서울강남구삼성동) 씨가 지난주 토요일에도 어김없이 트럭을 몰고 장애인들을 찾은 건 바로 그런 뜻이었다.

"우리야 남들처럼 큰 돈 척척 내서 도울 형편도 아니고…. 다른 쓰임새는 줄여도 먹고는 살아야 할테니 팔고 남은 야채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가져다 주는 것 뿐입니다. "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인가.

게다가 張씨가 서울거여동 무지개교회와 엠마뉴엘교회 1백여 장애인들을 매주말 도와온 것도 벌써 7년째.

장애인들과 張씨의 인연은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직장을 그만두고 맥주집을 시작했던 그는 6개월만에 모든 재산을 날리고 말았다.

어머니와 처자식을 월세방에 앉혀두고 그는 5백만원을 겨우 빚내 야채장사에 도전했다.

"경험부족으로 4~5개월만에 돈만 날리고 거리에 나앉을 처지가 됐죠. 정말 하루에도 몇 번씩 한강에 빠져 죽고 싶더군요. " 그런 그에게 용기를 준 이는 다름아닌 가락시장의 장애인 행상들. 휠체어와 고무튜브에 몸을 맡긴채 수세미등을 팔며 하루종일 시장바닥을 누비면서도 씩씩함을 잃지않는 세명의 장애인들을 보는 순간 '이렇게 사는 이들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마다 그분들을 볼 때면 덥썩 절이라도 올리고 싶었어요. 마침 친척에게 마지막으로 꾼 돈 16만원을 들고 어찌할까를 물었더니 시장내에 있는 가게주인을 소개해주며 장사하는 법부터 배우라고 조언까지 해주더군요. " 그때부터 張씨는 6개월간 오후엔 야채상회에 산지물건을 구해다주고 새벽녘과 오전엔 식당등의 거래처를 돌며 '집구경' 한번 못하고 길가와 트럭운전석에서 살았다.

80년대 중반 장애인과 그의 두번째 인연이 이어졌다.

서울한남동에서 장애아를 셋이나 데리고 버스를 기다리던 아주머니가 그에게서 야채를 산 것. 아무리 봐도 친자식들은 아닌 것 같아 쫓아가 보니 암사동 비닐천막촌에서 장애아를 열댓명 보호하고 있는 이였다.

그때부터 張씨는 틈만 나면 팔고 남은 야채를 그곳에 가져다 주기 시작했다.

소식도 없이 비닐천막촌이 이사가 버렸을 때까지 1년여 남짓 계속된 일이었다.

그러다가 지난 91년에 손님이던 삼육재활원 집사로부터 거여동의 무지개교회를 소개받았다.

40여명의 그곳 장애인들에게 야채를 대주기 시작하자 소문을 들은 엠마뉴엘교회 목사가 그를 찾았다.

"그때부터 매주 1백여명의 반찬거리를 고민하게 됐죠. 저희 살림도 빠듯하다보니 팔고 남은 것만 갖다 주는 것도 제법 부담이 되더군요. " 하지만 張씨의 그런 사정을 알게 된 가락시장의 상인들과 거래처 식당.반찬가게 주인들이 곧 그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주었다.

이젠 주말이 다가오면 야채며 반찬거리를 공짜로, 아니면 아주 헐값에 내주겠다는 이들이 먼저 張씨를 부른다.

압구정동의 한 일식집에선 벌써 2년째 매주 생선2궤짝씩을 보내주고 있고, 얼마전엔 1백80만원은 족히 할 배추 1트럭분 (약2천포기) 을 60만원에 팔아준 상인 덕분에 두 교회가 무사히 김장을 마쳤다.

부창부수 (夫唱婦隨) 일까. 노모와 자식 때문에 거의 집에서 살림만 한 張씨의 아내도 남편의 장애인 돕는 일엔 불평 한마디 없다.

배추를 나르다 張씨가 허리를 다치기도 했지만 보약대신 야채를 더 사다 주고 기뻐하는 부인이다.

"아들도 군대에 가있어 이 전셋집도 두식구 살기엔 넉넉해요. 갈곳 없는 장애인들에 비하면 행복한 거죠. " 그의 말엔 언제나 가슴에 기쁨을 안고 사는 비결이 담겨 있었다.

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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