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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cover story] 가진 것 적어도 마음은 부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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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여유로운 사람들이 있을까.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꽃이 핀다는, 지리산 남쪽 기슭 하동 화개마을. 이곳엔 '지리산 마실단'이라는 모임이 있다. 구성원은 도회지를 버리고 자연을 찾아 이곳에 온 문학.예술가 10여명. '10여명'이라함은 지금은 지리산을 떠나 있지만 틀림없이 돌아올 친구들을 넣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서란다. 시인 박남준(47).이원규(42)씨, 사진작가 이창수(44)씨, 공예가 김용회(38)씨 등이 멤버다. 스님이 되겠다는 어린 아들과 산자락에 깃든 남난희씨도 여기 속한다. 공통점은 녹차와 곡차(穀茶.술)를 좋아하며 자연 속에서 여유롭게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빈 한옥을 구해 고쳐서는 장작 때고 사는 게 보통이다.

처음엔 얼마나 힘들게 살까 했다. 막상 만나보니 그게 아니었다. 나름대로 예술 활동도 하고, 녹차도 만들고 해서 저금까지는 못해도 먹고 살 걱정은 없다고들 했다. 때때로 섬진강에서 은어를 잡아서는 같이 소주잔을 기울인다. 이원규 시인은 "이 정도면 신선놀음 아니냐"고 반문했다.

마실단의 시작은 1990년대 후반. 그때부터 하나둘 도시를 등진 사람들이 화개마을에 왔다. '꽃이 제일 먼저 필 정도로 따뜻해서'가 이유였다. 처음 산 생활은 힘들었다. 한 멤버는 "배는 고픈 데 돈이 없어 쌍계사 물통에 참배객들이 던져 놓은 동전 몇푼을 슬쩍 한 적도 있다"고 털어놨다.

그런 고단함을 잊고자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2~3일이 멀다하고 모여 술 마시고 놀았다. 돈은 그때그때 있는 사람이 냈다. '마실단'이란 이름은 마실다니듯 논다고 해서 동네 사람들이 붙였다. 늘 어울리다 보니 형제 같은 사이가 됐다.

이들이 자주 모이던 '단야식당' 여주인 구월순(49)씨도 멤버가 돼 누군가 서울에서 전시회를 연다면 식당 문 닫아 걸고 서울에 가는 정도다. 2000년 섬진강변에서 열린 김용회씨의 결혼식 때는 사진작가는 기념사진 찍고, 식당 주인은 음식 차려 내고, 시인은 축시 낭독하고, 또 누구는 천막 세우고 해서 정작 신랑.신부는 예식 때 입은 한복값 정도만 들었다고 했다.

이젠 모두 산 생활에 이골이 났다. 고단함이 사라지니 더 여유가 생겼다. 공예가이자 화가인 김용회씨는 누군가 그림을 다 털어갔는데도 '그럴 수 있으려니'했단다. 누가 그랬는지 알고서도 말이다. 아마 성불(成佛)하겠다는 아들을 대견해 하는 남난희씨의 여유도 그래서 생겼으리라.

하동=권혁주 기자<woongjoo@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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