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도 몸살 중소기업 설곳이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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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교환어음을 막으려고 당좌예금에 넣어 둔 29억원을 은행이 일방적으로 대출금 상환용으로 돌려 어이없게 부도가 났다.

은행이 자기만 살겠다고 이렇게 하면 살아남을 중소기업이 어디 있겠는가.” 지난2일 1백여개 협력업체에 끊어준 어음을 결제하기 위해 한미은행 울산지점에 입금한 돈이 차입금 상환으로 돌려져 쓰러진 울산의 선박제조업체 청구조선 (96년 매출액 4백80억원) 관계자들의 주장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은행은 부실채권을 회수하기 위한 조치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신뢰를 저버린 범죄행위" 라며 "국제통화기금 (IMF) 의 개입으로 중소기업은 정말 설 자리가 없어졌다" 고 말했다.

강원도횡성의 K전자산업은 경동보일러에서 납품대금으로 받은 7천5백만원의 어음등을 손에 쥐고도 이를 금융권에서 할인받지 못해 최근 쓰러졌다.

이 회사 金모 (45) 사장은 "장부상으로는 흑자이나 금융시장의 경색 때문에 20년 키워온 기업을 잃었다" 며 "직원들의 밀린 인건비가 걱정" 이라고 탄식했다.

또 인천의 가구업체 O가구는 부도난 바로크가구에서 받은 어음이 휴지조각이 된데다 다른 업체에서 받은 3억원짜리 어음도 금융권에서 할인받지 못하는 바람에 부도를 냈다.

IMF자금 지원조건 이행으로 종합금융등 금융권이 경쟁적으로 대출금을 회수하고 은행들이 어음할인을 끊어버리는 바람에 자금줄이 막힌 중소기업들의 '부도 도미노' 가 나타나고 있다.

올들어 한보.진로.대농.쌍방울.한라등 대기업의 침몰로 인한 협력업체의 연쇄부도에다 금융권의 어음할인 기피로 인한 부도까지 겹쳐 중소기업이 '부도대란' 의 와중에 있는 것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서울지역의 하루 어음부도율 (전자결제 조정 이전) 은 2일의 경우 올 평균의 20배가 넘는 7.23%까지 치솟았다.

서울지역 어음부도율은 지난 1월중 한보 부도사태로 0.19%로 뛰어오른뒤 2월 0.23%, 3월 0.22%를 거쳐 10월에 0.46%, 11월 0.41%로 껑충 뛰었다.

중소기업계는 부도를 줄이기 위해선 ▶만기도래 금융기관 차입금의 상환 유예 ▶중소기업 지원 재원 확보를 위한 무기명 장기산업채권 발행 ▶한국은행 총액한도 대출의 확대등 비상대책이 시급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의 이원호 (李源浩) 상근부회장은 "이달에는 중소기업 부도가 더 늘어날 것으로 우려된다" 며 "정부는 산업의 뿌리격인 중소기업을 지키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고 말했다.

이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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