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영컬처산책]4.'낡은 레일'위로 아이들은 달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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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우리 것은 좋은 것이야.” 어느 국악인이 텔레비전 광고에서 하는 말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그의 말처럼‘한국적’혹은‘전통적’생활양식을 일상 속으로 끌여들여 자기화하는 데 서툴지 않다. 기성세대들이 남의 눈치를 보며 의식과 행동의 괴리 현상을 보이는데 반해 그들은 드러내 놓고 자신에게‘좋은 것’을 취하고 있다. 목요일 저녁 서울 종로2가 어느 지하다방. 이곳은 90년대 중반부터 열풍을 일으킨 이른바‘사주카페’다. 커피나 국산차의 가격은 3천원,사주나 궁합을 보는 데는 1인당 1만원. 최소한 1만3천원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탁자수는 10개. 다섯 곳에서 젊은 남녀 혹은 여성끼리 얼굴을 맞대고 무언가 속삭인다. 간간이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한다. 상담을 끝내고 나가는‘미스’를 붙들고 말을 당겼다. -무슨 일로 여기 왔지요? “그냥 답답해서요.”(그녀는 대답을 굳이 회피하지 않았다. ) -무엇을 물어봤습니까? “궁합요.”-자주 이곳에 옵니까?“가끔 들러요.” -잘 맞습니까? “별로 그렇지 않아요. 얼마 지난 뒤에‘아 그랬구나’하고 맞는 경우도 있지만-. 여기보다는 이화여대 앞에 있는 카페가 더 잘 맞는 것 같아요.” 그녀는 대학 졸업반이라고 했다. 취업도 했고 하여 이성문제를 정리하기 위해 이곳에 들렀다고 한다. 알려진 대로 사주를 봐주는 사람 역시‘대학생 도사’다. 서울의 경우,종로뿐만 아니라 신촌·대학로,강남의 압구정 일대에 이런 카페들이 성업중이다. 대학내에 동아리를 두고 있는 한 역학단체는 광주·인천·원주 등 지방에도 분점과 연수원을 내고 있다. 대개 한 카페에 5∼6명의‘도사들’이 있고 1일 평균 20∼30명이 사주를 보기 위해 카페에 들른다고 한다. ‘사주카페’를 찾는 젊은이는 일종의‘순정파’에 속한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바로 자신의 책상에서 컴퓨터라는‘기계’를 통해 매일의 운세를 점검한다. 95년 하이텔에 역학동호회가 출범한 이래 현재 국내 각 PC통신에는 동호회뿐만 아니라 사주와 역학 관련 유료·무료의 정보들이 게재되고 있다. 2천7백명의 회원을 확보한 하이텔 역학동호회는 1년에 두차례 연수회까지 갖는다. “사주나 역학에 대한 거부감이란 있을 수 없지요. 맞고 안맞고를 떠나 생활의 일부로 정착돼 있어요. 결혼 전에 궁합 안보는 사람이 없잖아요. 젊은이들의 의식 자체가 변한 거지요.” 하이텔 역학동호회 대표를 맡고 있는 황성수(30·부산거주)씨의 말이다. 그는 “때론 운명론에 빠져 고민하는 사람도 없지 않지만,이를 응용해 긍정적인 생활을 펴는 사람이 더 많다”고 강조한다. 이른바‘역학’의 생활화가 젊은이들의 내면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라면,의상은 외부로 자신을 표출하는 방법중의 하나다. 개량 한복이 적지 않은 젊은이들의 일상복으로 자리잡았다. 여기에다 최근에는 60년대식‘촌티’의상이 등장해 복고풍의 새 모습을 보여준다. 샐 줄 모르는 깊은 겨울밤 어머니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듯한 스웨터와 삼베 같은 거친 질감을 그대로 드러낸 재킷,벨트를 매는 코트,몸에 꼭 끼는 셔츠와 무릎을 덮는 스커트 등이 그것이다. 한마디로 이들의 패션은 ‘촌티’그 자체를 거부하지 않는 것이다. 옷 자체의 소재나 디자인이 구식의 느낌을 주는 것 이외에도 이옷 저옷을 맞춰 입는 코디법으로‘촌티’를 연출하는 경우도 쉽게 눈에 띈다. 아주 고급스런 니트 위에 엉성한 재킷을 입는다거나 보라색과 갈색,카키색과 청색 등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색의 옷을 함께 입는 것이 그런 예이다. 신촌에서 만난 한 여대생은 “왜 그런 옷을 입느냐”는 질문에 기자를 마치‘낯선 곳’에서 온 사람이 아니냐는 투로 쳐다봤다. 질문 자체가 구세대적인 발상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것이다. 신정현(롤롤 마케팅팀 대리)씨는 “옷입기에 대한 기존의 정형화한 관념을 완전히 탈피해 보려는 의식이 이런 유행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 같다”고 진단한다. 국화빵이나 붕어빵이 거리의 명물로 등장한 것도 젊은이들의 기호에 접근한 상술의 하나라고 하겠다. 이보다 앞서 70년대 이후 복권된 우리의 전통놀이 가운데 풍물패는 중등학교는 물론 대학과 사회단체들에까지 확산돼 각종 행사를 리드하는 총아로 자리잡았다. 서울YMCA에서 풍물패를 지도하는 박금혜씨는“사물놀이는 배우는 과정이 시간과 인내를 요구한다. 그럼에도 우리 것이 좋다는 생각에서 날로 참가자들이 늘어간다”고 밝혔다. 국악의 생활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현상이‘교회’에서의 국악반주다. 주로 젊은세대들이 앞장서서 도입한 교회 국악반주단은 일부 기성세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교회의 토착화’라는 신학적 명제와 함께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서울 향린교회(중구 명동)에서 국악반주단을 이끄는 한동철씨는 일부러 시간을 내서 국립국악원에서 장구를 배웠다고 한다. 그는“하느님도 우리 가락의 찬양을 더 좋아 하실 거”라며“신앙심도 신명이 나야 깊어지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이에 이르면 일부 기성세대가‘낡은 레일’이라고 치부해 버릴 복고풍의 생활양식은 새것으로 교체돼야 할 표적이 아니다. 김재우(32·구통도가 전국대학생연합회 구도회장)씨는“구세대들은 아직도 낡은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인들이 뿌려놓은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곡해를 의식 속에 그대로 지니고 산다. 이에 반해 신세대의 의식은 과거의 기준에 얽매여 있지 않다. 그런데다 주위로부터 특별히 도움받을 상대가 없다. 자연히 사주와 같은 역학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고 보았다. 고려대 임희섭교수(사회학)는“젊은이들의 문화적 취향이 매우 다양해졌다. 세계화 과정에서 일어나는‘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이제는 생활화라는 실천적 단계에 이르렀다고 봐야 한다. 최근의‘IMF쇼크’는 앞으로 젊은이들에게‘우리 것’을 수호하자는 바람을 더욱 강하게 몰고 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영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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