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돋보기] “달아난 살인자의 용변 고이 모셔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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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글쎄 용의자가 그걸 이만큼이나 남겨 놨더라구요.” 검거 경위를 설명하는 안태정 천안서북경찰서 형사과장. [천안서북경찰서 제공]

지난달 19일 천안시 성환에서 살인사건 신고가 접수됐다. Y씨(49)와 S씨(21) 모녀가 자신들의 집에서 누군가로 부터 무참히 흉기에 찔려 숨져있었다.

천안서북경찰서는 곧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현장 감식에 나섰다. 경찰은 현장에서 범행에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흉기를 발견했다. 그리고 차고 뒤편에서 의외의 물체를 발견했다. 범인은 극도로 긴장한 나머지 생리적 현상을 참을 수 없었던지 범행 현장에 용변을 보고 그 물증을 한 무더기 그대로 남겼다.

범인은 용변 후 Y씨의 집에 있던 생활정보지를 찢어 뒤처리를 했다. 경찰은 Y씨의 집 안에서 중간이 찢겨져 나간 생활정보지도 찾아냈다. 현장 경찰팀은 고민했다. 범인을 밝힐 수 있는 유력한 증거물인 데 조사에 난점이 있기때문이다.

경찰 과학수사팀에 따르면 용변만큼 시료로서 효력을 보기 어려운 증거물도 없다고 한다. 쉽게 부패해 사건 현장에 도착하면 이미 증거 가치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란다. 또 범행(용변) 직후 바로 현장에 도착했다 하더라도 시료 채취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등에 보내 분석하는 동안 부패해 버리는 경우도 많다.

이 때문에 이번 사건의 현장 감식을 담당했던 충남지방경찰청과 천안서북경찰서 과학수사팀은 반갑기도 하지만 고민스러웠다. “가져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다 가져가야 하나. 조금만 가져가나. 어쩌면 아직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과학수사팀은 범인의 ‘거시기’ 전량을 수거해 급냉동시키는 정성(?)을 들였다. 이를 즉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보낸다. 그러고 며칠 후 반가운 소식이 날라 들었다. “거시기 속 DNA가 살아있다.”

또 며칠이 지난 9일 범인은 잡혔다. 거시기가 범인 신원을 밝혀낸 것이다. 살인용의자 C씨(56)는 절도 등의 전과로 17년을 감옥에서 보낸 사람이었다. 이제 다시 감옥에 가면 살아서 나온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C씨는 범행을 전면 부인하던 차였다. 그런데 남기고 온 ‘거시기’에서 자신의 유전자가 나왔다는 말을 듣고 결국 자백할 수밖에 없었다. C씨는 Y씨가 자신의 무절제한 이성 관계와 범죄 전력을 험담하고 다닌다는 소리를 듣고 Y씨를 찾아가 다투던 중 격분해 모녀를 살해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사건 발생 직후 Y씨 모녀의 최근 통화내역 5만 건과 주변 CCTV 자료 3만 건을 조사했다. 또 성폭력 전과자와 최근 출소자 등을 분석했다. 그래서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160여 명을 조사하던 중 주변 인물 C씨를 용의자로 지목하고 조사 중이었다.

천안서북경찰서 안태정 형사과장은 “과학수사팀이 세심한 현장감식을 해주지 않았다면 C씨는 끝까지 범행을 자백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말했다. 

장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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