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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새 정치 구호가 헛소리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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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이럴 수는 없다. 정말이지 국민이 불쌍해 더 이상은 지켜볼 수 없다. 도대체 무얼 하자는 정치인가. 이번만은 제대로 된 정치를 펼쳐 보일테니 부디 국회로 보내달라던 때가 바로 엊그제 아닌가. 구태를 청산하고 생산적인 일에만 매진하는 깨끗한 국회를 선보이겠다던 이들이 국회 문을 열고도 한 달 동안이나 공전을 거듭했다. 자연히 지난 1월의 탄핵파동 이후 6개월 동안 이 나라에는 국회가 없는 것과 같게 되었다. 산적한 민생법안이 국회 통과를 기다리고, 국회 동의가 없어 천연되는 정부의 현안과제가 한 둘이 아니지만 국회는 이를 외면한 채 주도권 싸움에만 열중했다. 그런 마당에 겨우 원 구성에 합의한 날 국회가 한 일은 고작 제 식구 감싸기의 구태를 재연한 것이었다.

다른 일도 아닌 선거법 위반으로 체포동의안이 제출된 동료 의원을 구하는 일에는 여야의 경계도 없었고, 언필칭 보수와 진보의 차이도 없었다.

이들은 말해 왔다.

"지난날은 잘못 투성이였습니다. 정치 선배들이 저지른 일입니다. 우리는 좀더 잘할 수 있습니다. 아니, 정치개혁 없이는 나라의 미래가 없으니 잠시 볼꼴이 사납더라도 새 정치 할 수 있게 정당 하나 새로 만들어 주십시오. 저희는 참회의 표시로 천막에서 정치합니다. 공판장에 당사를 얻었으니 새 정치에 대한 우리의 결연한 의지를 아시겠습니까. 정치개혁과 변화가 저희의 장사밑천입니다. 믿어주십시오! "

그래서 믿고 싶었다. 개혁과 변화를 선창하는 이들이 정치 일선에 나섰으니 정말이지 정치가 조금은 달라질 줄 알았다. 이런 희망을 가지고 살아온 이들에게 제17대 국회가 초장부터 펼쳐 보이는 모습은 사실상 무차별 폭력에 가깝다. 기대가 무너지는 이들이 느끼는 것은 마치 무엇으로 크게 한 방 얻어맞는 것 같은 당혹감이다.

새 정치를 하겠다던 말이 처음부터 헛소리였거나 새 정치를 할 만한 창의력과 대안 모색 능력이 부진한 데서 오는 결과다. 개혁정치를 주창해 이들이나 과거를 반성하고 새 출발하겠다는 이들의 진정성을 의심해야 하는 일이 참으로 가슴 아프지만 그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런 정치적 골무에서 빠져나올 때 다시는 같은 일로 고통당하지 않도록 예방적 처방을 축적하는 일에 태만하다는 점이다. 어디 다른 나라라고 처음부터 원활하고 유연한 의회 운영이 약속돼 있었겠는가. 다만 이들이 우리와 달랐던 점은 문제가 생겨 이를 극복한 연후에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처방전을 축적해 왔다는 사실이다. 원 구성에 실패하면서 캐나다 의회는 모든 안건에 우선해 국회의장을 선출해야 하며, 국회의장 선출 문제를 다루는 동안에는 휴회 동의를 포함해 어떤 동의도 제안할 수 없고, 어떤 이유로도 국회의장 선출이 방해될 수 없으며, 통상적인 회의 종료 시간이 경과하더라도 계속해서 국회의장 선출을 완료해야 산회할 수 있다고 의사규칙을 정비하게 되었다. 상임위원회 위원장 선출 문제도 일단 원이 구성되면 교섭단체 의석수의 비례에 따라 각 위원회에 교섭단체별 위원수를 기계적으로 배정하고, 그렇게 구성된 위원회 구성원이 선거를 통해 위원장을 선출하면 그만인 것이다. 이런 절차가 규정돼 있지 않아 새 국회를 구성할 때마다 힘겨루기로 세월을 보내야 한다면 바로 이런 내용을 의사규칙에 반영하면 되는 일이다. 국회의원 불체포특권의 경우도 선거법 위반이나 부패 혐의로 기소되는 때에는 이를 인정하지 않도록 제한하는 것이 옳다. 불체포특권의 취지가 이런 경우까지 보호하자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의회에서 최소한의 규범이 최선의 규범이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바로 그런 상황이 되려면 최소한 이견이 빈발하는 과제에 대해서는 어떤 규칙이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중립적 관점에서 국회 전반을 점검하고 대안을 제시할 범국민 국회개혁위원회 같은 기구의 출범이 시급히 요청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박재창 숙대 교수.의회행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