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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택의 숙청과 부활 (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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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택은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한의 경제 시찰팀을 이끌고 남한과 동남아시아로 자본주의를 학습하기 위해 순회했다. 2002년 7월 1일 발표된 ‘7.1 경제관리 개선조치’에 따라 북한 경제를 새롭게 개혁해 나가겠다는 의지의 표시였다.

사실 북한이 발표한 7.1 조치는 이미 2001년 벽두부터 예고되었다. 2001년 1월 4일자 ‘노동신문’에 따르면, 김정일은 “지난 시기에 마련한 터전에서 그 모양대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맞게 그 면모를 끊임없이 일신시켜야 한다”며 “모든 문제를 새로운 관점과 새로운 높이에서 보고 풀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이를 ‘김정일식 신사고’ 발언이라고 평가 한 바 있다. 또한 같은 해 10월 3일 발표된 “강성대국 건설의 요구에 맞게 사회주의 경제 관리를 개선 강화할 데 대하여”라는 담화는 9개월 후 시행된 7.1 조치의 골자를 담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7.1 조치가 상당기간의 준비와 고심 끝에 나온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다. 소위 북한에서 일련의 경제개혁 조치들을 발표해 나갈 때 절대 통치자 김정일 다음으로 북한의 최고 실세가 누구였나 하는 점이다. 김정일이 이런 일을 상의하고 대화하고 김정일에게 이 모든 조치들을 자신 있게 제안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사람이 누구였을까 하는 점이다. 그 인물이 바로 장성택 이었다. 이러한 모든 조치들이 이뤄지고 구상되고 발표된 시기는 다름 아닌 장성택이 김정일의 아들들을 제치고 김정일 후계자 제1순위라는 평가를 받고 있을 때 발표되었다는 시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2002년 9월과 11월에는 신의주 특별행정구역 설치를 발표하고 ‘금강산 관광지구법’ 및 ‘개성공업지구법’을 공포하는 등 일련의 특구확대 정책을 취하였다. 이 모든 경제개혁 조치들이 그리고 경제특구 설치를 비롯한 새로운 경제패러다임이 획기적으로 도입될 수 있는 모멘텀을 마련한 인물은 장성택이었다. 그는 공부는 모스크바에서 했지만 중국의 경제 개혁개방을 살피기 위해 누구보다도 중국을 자주 드나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고안한 북한식 맞춤형 경제 개혁개방 계획을 현실적으로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면서 싱가포르를 포함한 동남아를 누비고 다녔던 인물도 장성택이었다. 2002년 북한의 대남 경제시찰팀들이 남한의 산업시찰을 모두 마친 후 동남아시아로 향했을 때 이들을 이끌고 동남아 각국을 지도한 인물은 다름 아닌 장성택이었다. 그는 최근에도 싱가포르와 동남아시아를 가끔씩 가고 있다. 2007년에도 자신의 지병인 고혈압과 고지혈증을 치료하기 위해 러시아 크렘린 행정실 산하에 있는 중앙 클리닉 병원을 방문하여 치료를 받은 후 귀국길에 싱가포르를 들러 이곳에서 김정남을 만나 두 사람이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난 적도 있었다. 북한에서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만큼 북한 이외지역을 자유스럽게 누비고 다닐 수 있는 또 다른 인물은 장성택뿐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승승장구하던 장성택이 숙청된 것은 2004년.당 조직지도부 고위간부 자녀의 호화 결혼식에 그와 가까운 인물들이 대거 참석한 사실이 밝혀져 김정일 위원장이 엄벌을 지시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명분에 불과했고 실제로는 장성택을 김정일 후계구도에 최대 걸림돌로 보고 있는 김정일의 처 고영희와 그의 측근들에 의해 표적이 되었기 때문에 장성택은 고영희와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것이다. 이때만 하더라도 장성택은 김정일의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을 옹립하는 역할보다는 자신이 직접 킹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의 아내 김경희도 장성택을 포스트 김정일 시대를 개막하는 북한의 통치자로 만들 그런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장성택이 권력의 변방으로 밀려날 때 북한 경제관리 세대교체의 대표적인 예로 꼽혔던 리광근 내각무역상과 박명철 체육위원장 등과 같은 소위 장성택과 가까이 지냈던 인물들이 동시에 해임됐다. 또한 70년대부터 청년 조직인 ‘김일성 사회주의 청년동맹’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장성택과 친분이 두터웠던 지재룡 당 국제부 부부장이 2004년 3월 이후 공석에 나타나지 않았으며, 당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인 최춘황도 김일성 고급당학교로 좌천된 것으로 확인됐다. 장성택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최용수 인민 보안상도 해임되었다. 소위 이즈음에 장성택파는 ‘종파(파벌)행위’와 ‘권력남용’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줄줄이 낙마했다.

2004년 5월 26일에 고영희가 세상을 떠났다는 시점을 감안하면 장성택파를 하루라도 빨리 제거해야 한다는 고영희측근들의 생각은 그 만큼 절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고영희 씨의 핵심 인물로는 장성택 이후 최대 실세자리라 할 수 있는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을 맡고 있는 리제강, 현역 장성으로 당 제1부부장을 맡고 있는 리용철 등이 고영희의 최측근들이었다. 리제강은 김정일의 각별한 신임을 받고 있었고 당 인사권을 쥐고 있어서 장성택 라인을 제거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김정일의 친 동생이었던 장성택의 부인 김경희는 남편이 숙청당하는 것을 견디지 못해 우울증에 걸렸으며 김정일에게 심하게 따져 묻기도 했었다고 한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2004년 9월 일본의 도쿄 신문은 북한 사정에 밝은 소식통을 인용하여 “김경희 노동당 경공업 부장이 알코올 의존증과 정신질환 때문에 프랑스 파리에서 치료를 받았다”고 보도했었다.

결국 고영희는 2004년 5월 26일 프랑스 한 병원에서 유선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 6월초 북한에서 장례식을 치르게 된다. 그리고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다가 2004년 2월에 ‘권력욕에 의한 종파행위’를 이유로 직무정지 처분을 받았던 장성택은 2005년 12월에 다시 노동당 근로단체 및 수도건설부 제1부부장으로 복귀를 하게 된다. 꼭 1년 10 개월만에 복귀한 셈이다. 김정일이 그를 복귀시키기로 결심했던 배경으로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우선 장성택을 강력하게 견제했던 고영희가 죽고 없어진 이후 국정운영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고 상의할 수 있는 최측근이 필요했다는 점이다. 둘째, 고영희 쪽의 파워가 너무 비대해지고 있어서 이를 전반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새로운 측근의 힘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셋째, 이상의 두 가지 요인보다도 어쩌면 더욱 중요한 이유로 보이는데 장성택을 통해 북한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요구가 절박해 졌기 때문이다. 그동안 장성택은 북한 경제개혁개방조치를 주도해 왔었다. 그러다가 고영희등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려 장성택이 구상해 왔던 경제특구신설 문제와 개혁 조치들이 사실상 그 효과를 발휘할 수 없었다.

이러한 일들은 다음과 같은 사례에서 명확히 증명되었다. 지난 2006년 1월 이었다. 김정일이 중국을 방문했었다. 당시 김정일의 중국 방문은 두 가지 목적이 핵심 이유였다. 하나는 방코델타 아시아 은행에 불법자금으로 묶여 있었던 자신의 통치자금 2500만 달러를 해제시키기 위해서 중국정부측과 상의하기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신의주 경제특구 개발 착수에 대한 중국측의 입장을 타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김정일의 중국 방문 이후 북한 신의주와 중국 단동(丹東) 일대에는 ‘신의주 특구 개발 재착수’란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즈음에 ‘장군님이 장성택에게 경제 완전 위임 곧 신의주,남포 경제특구 발표’란 제하의 기사들이 북한 무역성 간부의 익명성 증언 형태로 나왔고, 남한 정보 당국자도 ‘지금 북한의 모든 경제정책 결정이 장성택에게 몰린다는 정보가 입수됐다’는 입장을 간접적으로 흘렸다. 당시 중국 단동에 파견된 북한 무역성 산하 K 무역회사의 고위 간부인 김모(51)씨는 익명을 전제로 한 월간지와의 인텨뷰에서 “현재 북한이 직면한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올해 안에 신의주와 남포(南浦)를 경제특구로 만드는 것에 대한 중앙당의 내부 방침이 결정된 상태”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김씨는 “발표 시기와 내용은 장성택 제1부부장(수도건설)이 귀국하는대로 결정될 것”이라고 했고, 그 무렵에 중국을 방문하고 있었던 장성택은 그의 말대로 3월 28일에 북한으로 돌아 갔다. 이 익명의 북한 무역회사 고위 간부의 발언은 4.15 태양절을 맞아 경제특구가 발표된다는 소문과 딱 맞아 떨어졌다. 그의 발언을 좀 더 살펴 보면 이렇다. “당시 장군님(김정일)께서는 이미 해가 바뀌기 전(2005년말)에 결심을 세운 것 같다. 장군님께서는 결심을 세운 뒤 1월(2006)에 중국에도 다녀가신 것이고, 장성택 부부장도 중국에 보내신 것 같다. 장군님께서 중국에 다녀가신 후로 중앙에서 외국과의 합영,합작 사업을 더 다그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의 발언대로 북한은 외국과의 합영 합작도 서두르게 되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익명의 북한 무역회사 고위 간부가 장성택 부부장의 당 복귀와 중국 방문이 경제특구 추진과 관련이 있다는 점을 확인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장군님께서) 결심을 굳히신 것이 확실하다. 그러니까 장성택 부부장을 다시 부르신 것이다. 중앙당에서는 앞으로 특구를 꾸리는 사업뿐만 아니라 경제문제 전반을 장성택 부부장이 틀어 쥐게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김정일이 자신의 매제인 장성택에게 경제전반을 위임했다는 김씨의 증언에 대해서 우리 정보당국은 “상당히 신뢰할 만한 정보”라고 평가했다. 그 당시 우리 정보당국자는 “최근 북한과의 경제교섭을 벌였던 우리 경제인들이 ‘모든 결정이 장성택에게 집중돼 있다’는 얘기를 한다”. “심지어 가택연금 당했던 장성택이 연금당한게 아니라 북한의 개혁, 개방을 준비해 왔다는 정보도 있다”라는 말까지 했다.

비록 장성택이 지금 맡고 있는 당 중앙위 행정부장이라는 자리는 과거 자신이 맡았던 조직 지도부 제1부부장직에 비해서 실질적인 권한은 많이 약할지 모르지만 그는 현재 김정일과 가장 가까운 친인척 이라는 점 이외에 워낙 친화적이고 겸손한 성품에다가 다재다능해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고 한다. 심지어 그는 지난 2002년 북한 경제시찰단과 함께 남한에 왔을때 서울 시내를 이동하던중 지하철 3호선에서 나이가 많은 송호경 아태위원장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지하철에서 내릴 때 까지 서서 갔었던 인간적인 면모와 겸손함을 보여 주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는 바로 이런 성격 때문에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종파주의’로 몰려 견제를 받아 왔던 측면도 없지 않았다.

장성택은 이미 그가 어떤 자리에 있느냐와는 상관없이 김정일 다음으로 북한내 최대실세임이 드러났다. 그를 견제했던 고영희도 없어졌고, 북한의 권부가 노년기를 향하고 있으며, 개혁개방정책을 통한 경제회복의 필요성도 절박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 보다도 최근 김정일의 갑작스러운 와병으로 인하여 김정일의 권력 공백기를 매울수 있는 대리통치자가 필요해 졌고 이런 제요인들이 장성택에 대한 김정일의 필요성과 의존도를 더욱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갈수록 장성택의 파워는 커질 것이다. 그것은 이미 노년기에 접어든 김정일의 건강이 완벽한 단계의 정상적인 건강한 인간의 모습으로 회복될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기 때문이다.

김정일의 건강이 나빠지게 되면 북한 내부에서 가장 우려스럽게 생각하는 부분이 바로 김정일이 과거처럼 현장시찰을 나서지 못한다는 점이고, 그렇게 되면 현장지도를 통해 북한인민들의 불만을 달래오고 지지를 유도해 냈던 통치리더십에 커다란 공백이 초래된다는 점이다. 바로 현장지도의 리더십 공백이 생기면 이를 무엇으로 대체할 것인가 하는 것이 김정일 건강 악화 이후의 북한이 안게될 또 하나의 숙제인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라도 김정일은 장성택을 더욱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김정일 건강 이상설이 확산되면 자칫 군의 통제가 이완될 가능성이 있고, 행정조직의 권력누수 현상이 빚어 질 수 있으며, 인민들의 체제에 대한 결속력이 저하 되면서 내부 관료들의 불안심리가 커질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북한은 동원정치가 불가능해 질 수도 있다. 바로 이런 권력의 누수현상과 체제의 이완상태를 막기 위해서는 김정일을 대신할 수 있는 상징적인 김정일의 복심腹心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김정일의 권력 대리자는 누구 보다도 북한의 전군상황은 말할 것도 없고 행정,조직,당,정보,외교등의 문제에까지 총괄했던 경험을 갖고 있어야 하고 북한 내부의 국정상황을 한 눈에 꿰뚫어 볼수 있는 충복이어야 한다. 지금 김정일의 입장에서 북한 내부체제를 유지해 나가는데 자신의 여동생의 남편인 처남 장성택만한 인물은 없는 것이다.

이미 장성택은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졌을때 사실상 김정일을 대신해서 북한 전역을 관리하는 2인자로서의 위치에 들어섰다. 장성택은 김정일의 신임아래 북한 내부를 거의 장악한 것으로 전해 진다. 김정일이 북한의 경제를 개혁개방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도 장성택의 역할은 필요한 시점이다. 그리고 김정일이 자신의 권력을 아들들에게 이양하기 위한 마음의 작업을 마쳤다 하더라도 지금으로서는 장성택의 도움과 힘이 필요한 시점이다. 아직은 김정일의 아들들이 지도자로 나서기에는 너무 어리거나 아니면 지도자 수업이 충분히 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일정한 권력이양의 과도기를 거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렇지 않고 바로 김정일의 세 아들중 한 명을 상징적으로 내세워 북한의 통치방식을 집단지도체제의 형식으로 꾸려 나가거나 아니면 단일지도체제로 이끌어 나간다고 하더라도 김정일 아들 중심의 통치행위가 작동하려면 장성택의 지원은 절대적으로 필요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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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장성민은…
서강대 정치외교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연세대 국제학대학원에서 북한정치를 연구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세인트존스대학 국제문제연구소에서 '현대 영국과 국제문제'과정을 이수했다. 이후 미국 듀크대 국제문제연구소에서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연구했다. 국민의 정부 시절 청와대 초대 국정상황실장과 16대 민주당 의원을 지냈다. 의원시절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세계와 동북아 평화포럼' 대표, 한국국제정치학회 이사로 활약중이다. 저서와 역서로 '전쟁과 평화: 김정일 이후, 북한 어디로 가는가' '전환기 한반도의 딜레마와 선택"9·11테러 이후 부시 행정부의 한반도 정책'등이 있다.


장성택 부상이후 북한을 어떻게 볼것인가

①장성택, 김정일 이후 킹인가,킹메이커인가

②장성택의 숙청과 부활

③장성택과 포스트 김정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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