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기업 회생시켜 준다고 해놓고 부도 내서야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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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이럴 바에는 기업 신용평가를 왜 했는지 은행에 묻지 않을 수 없다.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을 하겠다는 건 그 기업을 살리기 위해서다. 자구 노력을 하면 빚 상환을 유예해 주고, 새로 자금도 빌려줘 정상적인 기업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런데 살려주겠다면서 워크아웃 등급(C등급)을 매긴 기업들조차 줄줄이 나가떨어지고 있다면 뭔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다.

지난달 하순 2차 평가 때 C등급을 받은 13개 건설사 가운데 2개 사가 최근 부도났다. 일각에서는 더 많은 C등급 업체들의 부도를 전망한다. 지난 1월 1차 평가 때도 그랬다. 당시 C등급을 받은 삼능·대동은 물론 B등급의 신창건설마저 부도나거나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물론 C등급 업체들이 모두 살아야 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경제 사정이 악화돼 평가 당시보다 살리는 비용이 급증했다면 퇴출시킬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번 건은 그렇지 않다. 평가가 끝난 지 불과 일주일밖에 안 된 기업들이다. 2월에 평가된 기업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원인은 자명하다. 은행이 평가를 부실하게 했거나, 당초 약속한 지원을 제대로 하지 않았거나 그 둘 중 하나다.

지금으로선 둘 중 어느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어느 것이 됐든 은행 등 채권단의 구조조정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건 한가지다. 평가가 부실했다면 은행의 평가 능력에 문제가 있다. 평가는 잘 했는데 지원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면 은행 주도의 민간 구조조정 방식이 문제다.

살리겠다고 해놓고 죽인다면 구조조정에 대한 불신이 매우 커진다. 앞으로는 C등급이 사라질 게 분명하다. 퇴출을 의미하는 D등급으로 인식된다면 아무리 돈을 대준들 부도를 막을 수 없다. ‘살려준다더니 부도가 웬 말이냐’는 불만도 속출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향후 시작될 해운업과 대기업그룹 구조조정이 큰 타격을 받는다. 일정대로라면 이달 말까지 신용평가가 마무리되는데, C등급을 받는 순간 퇴출로 귀결될 것이다. 사안이 이렇다면 구조조정은 이제 더 이상 민간에 맡겨둘 일이 아니다. 정부가 지금까지의 구조조정 과정과 결과를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그래서 민간의 평가 능력에 문제가 있다면 보완책을 마련해 줘야 한다. 민간 주도의 구조조정 방식이 원인이라면 정부가 전면에 나서는 걸 적극 검토해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구조조정이 미흡하다는 지적이 많다. 그런 터에 불신까지 받는 현 상황을 가벼이 여겨선 결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