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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정책이 독이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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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허걱. 우락부락 근육질 조폭은 맞춤법 빵점짜리 글귀를 남기고 학교로 돌아갔다. 물론 학교 생활은 좌충우돌 해프닝의 연속이지만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한 그의 노력은 눈물겹다. 2001년 ‘오늘의 우리 만화상’을 받은 신일철의 『차카게 살자』다. 보다 보면 배꼽을 잡지 않고는 못 배긴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만화에는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조폭조차 강박관념을 가질 정도로 ‘착한 삶’을 중시하는 이 땅의 정서가 배어 있어서다.

맞다. 착하게 사는 건 칭찬받을 만하다. 그런데 무조건 착해서는 곤란할 때가 있다. 특히 경제 정책이 그렇다. 숨이 끊어질 것 같은 기업에 국민 세금을 지원하는 게 맞는 걸까. 회사가 파산해 거리로 나앉을 직원을 생각하면 착한 쪽으로 기우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산소호흡기로 연명할수록 사회적 비용만 늘고, 업계 전체를 부실에 빠뜨린다면 이건 공멸의 길이다.

세계경제가 대공황 이후 최대의 경기 침체를 겪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구조조정의 울림이 별로 없다. 할 게 없다면 다행이지만 과연 그럴까. 세계가 하나로 연결된 시장에서, 특히 수출 비중이 큰 한국이 독야청청할 거라 기대하는 건 과대망상이다.

최근 발표된 186개 건설·조선사 구조조정만 해도 그렇다. 두 차례의 경영 진단 결과 금융 지원 중단 대상으로 선정된 곳은 건설사 5개, 조선사 2개가 전부다. 대부분 법정관리를 신청했거나 대주주가 포기한 회사다. 반면에 ‘건강하다’는 진단을 받은 신창건설은 한 달 만에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정부는 뒤로 빠지고 은행 등 떠밀어 시늉 낸 구조조정은 빈 수레만 요란했을 뿐이었다.

상처를 제때 도려내야 새살이 돋는다. 작은 균열을 놔두면 결국 댐은 무너진다. 당장 부담스럽다고 부실을 뒤로 미뤘다가 막판에 한꺼번에 기업이 쓰러지면 모두 결딴나는 거다.

외환위기 때 우리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했다. 거리에 실업자가 넘쳤지만 눈 딱 감고 그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뼈를 깎는 고통의 대가는 건강해진 기업이다. 되살아난 기업은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들어 빚을 갚을 수 있었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가 지금 소니나 도요타와 맞짱 뜰 수 있는 건 그때 이 악물고 상처를 도려낸 덕이다.

일본 기업들은 이런 아픈 기억을 이번에 되갚겠다는 각오다. 종신고용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소니·파나소닉·NEC 등이 이미 1만 명 넘게 감원하겠다고 밝혔다. 날렵한 몸으로 세계시장을 다시 휘어잡겠다는 야심이다. 도요타의 오쿠다 히로시(奧田碩) 전 회장은 1990년대 후반 이렇게 말했다. “직원을 해고하는 경영자는 배를 가르라.”

이런 도요타도 6000명의 직원을 줄이기로 했다. 얼마나 독하게 마음먹었는지 보이지 않는가. 경쟁력 없는 좀비 기업은 시장에 맡겨야 한다. 다만 그렇게 해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재기할 수 있도록 직업 교육을 강화하거나, 새 사업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확대하는 게 낫다. 착한 정책이 독이 될 수 있다.

김종윤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