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춤과 가꿈이 자신감을 만든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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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호 20면

사람은 왜 화장을 할까.
제례(祭禮)를 위해 화장을 하는 원시 부족에선 화장의 종교적 효용을 읽어낼 수 있다. 부족 간 전쟁을 앞두고 화장하는 경우에는 공동체의 결속을 높이기 위해서란 진단이 가능하다. 죄수에게 강제로 문신을 했다면 사회질서를 유지하려는 목적이 있을 것이다. 의학적으로는 피부 보호처럼 건강과 관련된 효용을 따질 수 있다. 비교행동학자들은 성적(性的) 표현 수단으로서의 화장에 관심을 둘 것이다. 화장하는 사람이 느끼는 심리적 효용도 따져볼 만하다.

화장의 심리학

화장은 색의 배치를 달리해 인상을 바꾸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심리학에서 말하는 착시(optical illusion)와 통한다. 아이섀도를 이용해 눈썹 밑을 어두운 색으로 칠하면 얼굴 윤곽이 뚜렷해진다. 기모노를 입은 일본 여성의 화장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입을 작게 보이고 싶을 때는 파운데이션으로 입술 윤곽을 없애고 루주로 실제보다 작고 진하게 입 윤곽을 그리고 안쪽을 약간 연하게 바른다.

모두 인상을 바꾸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이런 기술은 사실 여성들이 심리학을 배워 응용했다기보다 경험적으로 체득한 지혜다. ‘여성은 거울 앞에서 다 심리학자’라는 말도 이래서 나온다. 현대 일상생활에서의 화장은 자신의 외관상 결점을 감추거나 자기다움을 강조하는 데 역점을 둔다. 자연스럽게 착시를 노리는 셈이다.

착시를 노렸다는 것은 ‘속임수’라는 뜻도 된다. 그래서 외모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본질적 가치는 별로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화장이 자신의 마음과 남의 행동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는 실험 결과가 여럿이다.

1983년 일본 도쿄의 긴자 거리에서 여대생을 상대로 한 심리 실험이 있었다. 보행자 대상의 설문조사를 한다고 여대생을 모았지만 사실은 화장이 이들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따져 보는 실험이었다. 우선 전반부는 평상시의 연한 화장을 하고 설문을 하게 했다. 그 다음 후반부는 메이크업 전문가를 동원해 여대생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화장을 하게 하고 설문을 하게 했다.

그 결과 화장이 여성의 자신감을 높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내성적인 사람일수록 대인관계를 적극적으로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일본 여성을 대상으로 한 다른 의식조사에서는 화장을 하면 ▶기분 전환이 되고 ▶심리를 안정시켜 주며 ▶기분 좋은 긴장감을 주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변신하려는 욕망과 자기 현시 욕구를 충족시켜 줌으로써 자신감과 자기충족감을 주는 측면이 있다는 분석도 있다.

화장은 창조적인 즐거움을 느끼게도 한다. 자신의 얼굴을 가장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캔버스’처럼 여기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게다가 요즘은 아이섀도와 파운데이션의 종류도 무척 다양하게 나와 있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의 심리를 감추기 위해 화장하는 경우도 있다. ‘마음을 비추는 창’인 눈을 가리는 선글라스처럼 자신을 은폐하는 효과가 있다는 짐작이 가능하다. 임상심리학적인 효과도 있다. 우울증 환자나 노인성 치매 환자에게 화장을 하게 할 경우 비록 병 자체를 치유하지는 못하지만 환자의 의욕을 높이고 기분을 좋게 만드는 긍정적 반응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옳든 그르든 간에 화장품을 사회적 신분을 표시하는 잣대로 여기는 이들이 있다. 사실 지갑이 두둑하지 않으면 값비싼 유명 브랜드의 화장품을 맘 편히 소비하기는 쉽지 않다. 아름다움 자체가 사회적으로 유리한 경쟁요소가 된다는 연구 결과도 많다. ‘아름다운 사람=좋은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이 존재하며, 아름다운 사람은 주위로부터 쉽게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취직 면접 시 능력 평가에서도 유리하다는 분석이 있다. 매력적인 사람은 타인을 쉽게 설득할 수 있으며, 실수도 너그러이 용납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화장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각은 다양하다.

“인간 자연의 모습은 거칠고 불결한 것이며, 이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바꿔야 한다. 그런 의지와 치장의 기술이야말로 인간이 고귀한 이유다.”
‘악(惡)의 꽃’으로 유명한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는 미술비평집 /현대생활의 화가'(1863) 속의 글 ‘화장예찬’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화장을 통해 비로소 여성의 아름다움은 고귀해진다”는 말까지 했다. 화장품 업계가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말이다. 하지만 이런 보들레르의 시선이야말로 여성성을 대상화하는 남성중심적 사고라는 비판이 만만치 않다.

남의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몸의 주인으로서, 자기 개성을 표현하는 아름다움의 주체로서 화장을 바라보는 사람도 늘고 있다. 이들은 화장이 미적·성적 본능에 충실한 행위라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자신의 삶을 위한 것이고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라 믿는다. 여성의 사회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이런 추세는 강해졌다. 기초화장품이나 기능성 화장품의 수요가 급증한 것이나 자연스러운 화장법이 대세가 된 것도 이런 흐름과 관련이 깊다.

구라모치 기쿠코(倉持喜久子) 일본 시세이도 미용과학연구소 연구원은 "화장심리학-화장과 마음의 사이언스"에서 “요즘에는 형태미뿐만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의 감각이나 사고방식, 사회와 관계하는 방법, 생기 넘치는 피부, 상쾌한 미소의 건강한 아름다움이 주목받고 있다”고 분석했다. 활짝 웃는 얼굴이야말로 지상 최고의 화장이란 말이 헛된 공치사는 아니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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